YS­정주영대표의 신경전/오병상 정치부기자(취재일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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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요즘 정주영국민당대통령후보의 심기가 대단히 편치않다. 지난 23일 아침 갑자기 기자실로 들어선 그는 느닷없이 김영삼민자당대통령후보를 『믿을 사람이 못된다』며 『인간성이 의심된다』고 퍼부었다.
심지어 『용은 한번만에 승천한다. 오르다 떨어지면 이무기가 된다. 또 떨어져 미꾸라지가 되려는 모양』이라고 비아냥댔고 끝내는 『역시 머리가 모자란다』는 인신공격을 서슴치 않았다. 평소 YS를 『구정치인중 가장 나은 사람』이라던 평과는 판이했다. 측근들까지 『그렇게까지 얘기할줄 몰랐다』『너무 직설적인것 아니냐』며 고개를 갸웃거릴 정도였다.
정 대표를 화나게 한데는 몇가지 사연이 있었다고 한다. 첫째는 『정 후보가 대통령선거의 어느단계에서 YS의 손을 들어주고 중도포기할 것』이라는 설때문이다. 후보로 나선 사람에게 「중도하차설」은 치명타가 아닐 수 없다. 비민주 강릉·울산 등 지방모임에서 오랜 친분관계인 사람들이 설의 진상을 묻자 그는 몹시 격분했다고 한다. 그로서는 설의 근거가 돼온 「YS와의 친분」을 확실히 끊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음직하다.
둘째로 『YS쪽에서 국민당을 와해하고 이종찬 징계후 부족해질 안정의석(과반수) 확보를 위해 국민당당선자를 빼간다』는 또 하나의 설때문이다. 이 대목은 정 후보의 날카로워진 신경을 더욱 잡아당긴 듯하다. 이미 조윤형최고위원이 YS와 비밀회동한 사실,구야당의 YS계였던 몇몇당선자들에게 여러차례 손길이 뻗치고 있다는 소문은 위기감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하다. 더욱이 정 대표는 이런 설들을 공작차원에서 YS측이 유포하고 있다고 믿는 것 같다. 정 후보를 괴롭히는 설들은 정치역학상 능히 있을 수 있는 일들이고 그런 설을 정말 YS측이 흘리고 다닌다면 비난받아 마땅하다. 14대 국회가 개원도 되기전에 국민당 당선자를 구연과 「자리」를 앞세워 빼오려 한다면 그런 발상은 국민과 의회민주주의를 우습게 보는 구태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정 후보의 비난 역시 설에 대한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객관적 근거를 제시하지 않았기에 「감정적」「원색적」이란 혹평을 피하기 어렵다. 새 정치를 주장하며 대권을 향해 나선 정 후보의 행태가 구정치의 한계에 머무른다면 딱한 일이다. 구정치인을 꾸짖는 새정치인의 말은 사실에 근거한 「논리적 주장」인 동시에 사실만큼만 얘기하는 「이성적 표현」이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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