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벌기 전격 합의… ‘명분 쌓기’ 마음 통했나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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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호 04면

협상 시한의 48시간 연장은 한국과 미국의 전술이 묘하게 짝을 이루며 빚어낸 절충안이었다. 일단 양국은 연장에 합의함으로써 타결 의지를 다시금 확인한 셈이 됐다. 그래서 명분 쌓기용이라는 해석도 나온다.

무엇보다 한국은 쉽게 타협하는 모습을 보일 수 없는 상황이었다. 지난해 2월 초 FTA 협상 개시를 선언한 뒤 423일간 정부와 노무현 대통령은 농민ㆍ시민단체 등 반대론자들로부터 뭇매를 맞았다. 따라서 정부로선 “끝까지 최선을 다했다”는 명분을 얻어야 했다.

상황은 여의치 않았다. 정부는 협상 내내 “쌀을 꼭 지키겠다”고 외쳤다. 타결이 되면 “쌀은 지켜냈다”며 국민을 설득할 심산이었다. 그러나 이를 간파한 듯 미국은 자국의 자동차 관세철폐에 소극적으로 대응하며 버티기 작전을 펼쳤고 막판 협상이 예기치 못한 혼선을 빚었다.

시한은 다가오는데 팽팽한 공방이 이어지자 미국도 급해졌다. ‘선(先)타결선언, 후(後)조문화’ 제안으로 시간을 벌어보려 했다. 그러나 한국으로선 이를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이면 합의’라는 비난이 나올 수 있었기 때문이다. 개성공단 제품을 한국산으로 인정할지를 놓고 빌트인(built-in, 협정 발효 뒤 재논의)으로 처리한다는 방침에 대해서도 졸속이라며 반발이 거셌다.

협상 실마리는 시한이 다가올수록 꼬였다. 금융분과장인 신제윤 재정경제부 국제금융심의관은 11시쯤 “잘 안 된다. 시간 더 걸린다. 양쪽도 벼랑 끝이다”며 답답해했다. 백악관 대변인은 시한을 몇 시간 남기고 “몇 시간 안에 중대한 진전이 없으면 합의 도출이 어려워질 수 있다”는 이례적인 e-메일 성명을 통해 ‘압박 전술’을 구사하기도 했다.

특히 30일 밤 10시쯤부터 정부 일각에서 곧 타결 선언을 할 것이란 소식이 들렸다.
그러나 타결 소식은 계속 미뤄졌고 협상단 주변에서는 “자정쯤이다” “오전 1시30분으로 미뤄졌다”는 이야기가 계속 흘러나왔다. 한때 기자회견을 위한 브리핑장을 설치하려다 치우는 모습도 목격됐다. 협상장이 긴박하고 엎치락뒤치락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협상이 초읽기에 들어가면서 양국 협상단은 애간장이 탔다. 협상이 결렬될 때 직면할 정치ㆍ경제적 파장을 우려해 담판 성사를 위한 고육지책이 필요했다. 결국 ‘시간 벌기’가 막판 최대 화두로 등장한 것이다.

명분이 필요했다. 이때 미국 의회가 해결사로 등장했다. 미 협상단의 노련한 변호사들이 의회에 유권해석을 요청해 공휴일까지 시한을 늘려도 된다는 답변을 받아낸 것이다. 변호사들은 당초 협상 시한은 31일 오전 7시(미국시간 30일 오후 6시)지만 휴일 등을 뺄 경우 이틀 정도 연장이 가능하다고 설득했다. 그래서 48시간이 늘었다.

미 협상단이 이미 토요일 오전 7시가 아닌 월요일까지를 협상 기한으로 잡고 막판 비상카드로 썼을 가능성도 크다.

백악관 사정에 밝은 워싱턴의 외교소식통은 “미국이 애초 설정한 시한을 넘긴 것은 국내 여론을 설득하기 위해 실리를 더 챙겨야겠다는 뜻”이라며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은 미국 의회를 장악한 민주당이 비준권을 앞세워 부시 행정부를 압박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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