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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다고?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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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호 10면

영화 ‘귀여운 여인’에서 백만장자와 창녀의 차이를 뛰어넘어 멋진 사랑의 결실을 보았던 줄리아 로버츠와 리처드 기어. 그들이 맺어진 다음의 이야기는 어떻게 됐을까. ‘노팅힐’의 휴 그랜트와 줄리아 로버츠는, ‘슈렉’의 피오나 공주와 슈렉은 또 어떻게 됐을까.

영화 속 별리, 그 쓸쓸한 표정-‘브레이크 업-이별후애(愛)’

불같은 사랑에 빠져 결혼하고 또 몇 년을 살면서 애정의 기승전결을 겪어본 사람이라면 ‘그들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의 신화에 콧방귀를 뀌게 된다. 남녀가 같이 사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 연인은 지극히 사랑스럽지만 배우자는 말도 못하게 지겨운 것이 만고불변의 진리. 더구나 ‘결혼한 세 쌍 중 한 쌍은 이혼’이라는 통계가 ‘헤어짐’에 대한 죄책감마저 덜하게 만드는 세상 아닌가. 사랑의 추억만을 간직하고 살아가기엔 남녀의 공존은 너무나 버겁고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다.

새 영화 ‘브레이크 업-이별후애’는 그 로맨틱 코미디의 후일담쯤 된다. 야구장에서 한눈에 반한 주인공 빈스 본과 제니퍼 애니스턴은 다음 장면에서 바로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지 못하는 커플로 바뀌어 대뜸 ‘헤어지자’고 말한다. 돌이켜보면 사랑에 빠지는 연인들의 영화에 비해 헤어짐에 주목한 영화는 많지 않았던 듯하다. ‘장미의 전쟁’이나 ‘스토리 오브 어스’처럼 간간이 부부생활의 위기에 눈길을 보냈던 할리우드에 비해 헤어짐에 진지하게 고민한 우리 영화를 떠올리려면 더 기억이 가물가물해진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금요일 밤의 영원한 인기 시리즈 ‘부부 클리닉-사랑과 전쟁’이 있다. 벌써 7년째 대한민국 부부들의 속내를 파헤쳤던 이 드라마에서 우리는 숱하게 헤어지는 커플을 봐왔다. 고부 갈등, 혼수 문제에서부터 아내의 여자친구, 남편의 동성애, 춤바람 난 여자, 심지어 자신의 과거를 속인 가짜 아내까지. ‘부부 클리닉’이라는 제목처럼 고장 난 부부관계를 고쳐 주기보다는 남녀가 헤어져야 할 수백 가지 이유를 보여 주면서 이 드라마는 보는 사람에게 공감과 함께 “그래, 헤어져라 헤어져!”라며 표를 던지는 묘한 쾌감까지 느끼게 해준다.

이 시리즈에서처럼 명백히 누가 봐도 헤어져야 할 이유를 가진 사람들이라면 헤어지는 일이 오히려 쉬울 수 있다. 문제는 모두가 그렇게 ‘명백한’ 이유로 헤어짐을 고민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게다가 이혼이란 것이 내 일이 된다면 결정은 그리 쉽지 않다. 결국 모든 커플의 문제는 명백한 이유가 없지만 점점 벌어지는 관계의 원인은 어디 있는지, 극복해야겠다는 의지를 가질 것인지, 헤어져야겠다는 결단을 내려야 할 것인지 알아야 한다는 데 있다.

‘브레이크 업’의 두 번째 신에서 영화는 ‘명백하지 않은 이유’도 충분히 사랑했던 두 사람을 갈라서게 만들 수 있다는 훌륭한 예시를 보여 준다. 저녁 준비에 바쁜 여자는 남자의 퇴근길에 레몬을 사오라고 부탁한다. “왜 레몬이 세 개뿐이지? 열두 개 사오라고 했잖아?” “왜 레몬이 열두 개나 필요한 건데?” “장식용이란 말이야” “왜 장식에 열두 개나 낭비해야 하지?” 이렇게 시작된 두 사람의 다툼은 설거지를 당장 해야 하는 깔끔한 여자 대 비디오 게임을 하는 남자, 진심으로 자신과 발레 구경 가길 ‘원하는’ 여자 대 ‘원하지는 않지만 봐줄 수는 있다’는 남자의 대결을 거쳐 결국 “나에 대해 고마움을 느끼지 않는” 남자에 대해 여자가 헤어지자고 말하면서 끝장을 본다. 사소한 말다툼이 거대한 증오의 벽이 돼 가는 모습이 공감을 이끌어 내는 좋은 장면이다.

하지만 영화는 ‘장미의 전쟁’처럼 커플들이 이를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을 블랙코미디의 감성으로 통렬히 풍자하거나 ‘스토리 오브 어스’처럼 깨어진 관계를 극복하는 가족 드라마 어느 쪽도 아닌 남녀 간의 토닥거림을 계속하는 로맨틱 코미디의 전개를 유지하면서 뒤로 갈수록 힘을 잃는다.

헤어지자는 주인공 목표의 걸림돌로 ‘한 집에 계속 살아야 한다’는 장애물을 설정한 영화는 이후 이 커플이 누가 더 속을 긁어 놓는가 경쟁을 하면서 친구 앞에서 망신 주기, 서로의 가족 비난하기, 이성 친구들 데리고 와서 질투심 불러일으키기 등 미운 짓의 극단으로 치닫는 과정을 시트콤처럼 나열한다. 물론 그 에피소드들에 나름대로 공감할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관객들은 애초에 제니퍼 애니스턴, 빈스 본 같은 멋진 배우들이 헤어지기를 바라지 않기 때문에 그들의 우스꽝스러운 행동에 설득 당하지 않는다. 또 ‘웨딩 크래셔’나 드라마 ‘프렌즈’에서 뛰어난 코미디 연기를 보여 줬던 이들을 데리고 영화는 우스꽝스러운 행동 뒤에 있어야 할 위트나 따뜻한 유머를 보여주는 데 실패해 관객으로 하여금 주인공들에게 어떤 감정을 가져야 할지를 헷갈리게 만든다.

결국 화성인과 금성인만큼이나 다른 남녀 커플이 같이 살아가기가 얼마나 힘든지만 실컷 보여준 영화는 관계의 극복에 대한 지혜도, “헤어져라 헤어져”라고 통쾌하게 외칠 수 있는 관객의 카타르시스도 안겨주지 못한 채 어정쩡한 결말을 내린다.

영화는 마지막에서 두 사람의 재회에 대한 암시를 슬쩍 던지는데, 두 사람이 또 그렇게 애정의 불씨를 지펴 다시 살아간다면 그들은 또 로맨틱 코미디의 주인공이 될 수 있을까. 그렇지는 않아 보인다.

명백하지 않은 이유로 싸운 커플에게 명백하지 않은 결론을 내린 영화에서 관계에 대한 어떤 대답을 얻어야 할지 당혹스러워진다. 하긴 이유도 없이 좋았던 그 목소리, 그 말투가 징그럽도록 싫어지는 남녀관계의 마법 같은 메커니즘이 뚜렷이 밝혀지지 않고서야 사랑의 사그라짐에 대해 명백한 원인과 해결을 들이미는 영화를 만들기도 쉽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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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정씨는 일간지 문화부 기자를 거쳐 영화제작자로 활약한 문화통으로 문화 전반을 꼭꼭 씹어 쉬운 글로 풀어내는 재주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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