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의 남자’로 산 그림자 세월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2호 11면

뮤직 비디오로 데뷔한 지진희는 여러 편의 드라마에 출연하면서 인기를 쌓아갔다. 그러나 첫 단추의 강인한 인상 때문이었을까. 그가 맡은 배역은 ‘누군가의 남자’가 많았다.
지진희를 안방극장에 처음 알린 드라마 ‘줄리엣의 남자’(SBS)에서 그는 줄리엣의 백화점을 노리는 야심 찬 로미오로 출연하지만, 제목에서조차 등장하지 못했다. 김현주와 함께 출연한 ‘파란만장 미스 김 10억 만들기’(SBS)도 미스 김의 드라마였으며, 긴 공백 끝에 돌아온 톱 여배우 고현정과 호흡을 맞춘 ‘봄날’(SBS)의 스포트라이트는 고현정의 몫이었다.
물론 여성 캐릭터의 충실한 보좌로 멋지게 홈런을 날리기도 했다. 이영애와 나온 ‘대장금’(SBS)이 그 드라마. 40%대의 시청률을 기록하고 최고의 한류 드라마라는 평가를 받으며, 이영애와 지진희를 다시 보게 만들었던 작품이다. 이 드라마에서 지진희는 장금이의 든든한 지원자인 민정호 역을 맡았다. 그러나 ‘종사관 나으리’ 민정호의 인기는 올라갔지만, 드라마의 주인공은 어디까지나 장금이였다.
그도 여러 인터뷰에서 “‘대장금’은 얼굴 알릴 시간을 앞당겨준 작품이고 덕분에 동남아에서도 큰 인기를 얻었다. 그러나 ‘대장금’은 내 드라마가 아니라 이영애씨 드라마다. 그래도 민정호가 워낙 멋있게 나와 장금이 다음으로 많이 알려진 인물이라 고마울 따름이다”고 밝혔다. 이 말에는 지진희의 생각과 평소 행동이 녹아 있다. 자신의 영역을 고집하지 않고, 오히려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 한동안은 그림자처럼 남아도 내실을 충실히 하겠다는 생각.
인터뷰의 한 대목에서도 겸손과 인간미를 보이더니, 지진희는 ‘야심만만’(SBS) 같은 토크쇼 프로그램에 게스트로 출연해 매력을 발산했다. 6년 된 연인에 대한 이야기, 손으로 노트며 스튜디오 세트까지 만들어내는 재주 등이 소개되면서 20∼30대 여성 팬의 인기를 끌어 모았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말을 너무 못해 오락 프로그램 출연은 못하겠다”고 밝혔다. 지진희는 손사래를 치지만, 가정적인 남편이면서도 싱글녀들의 인기도 몰고 다니는 30대 후반의 남자 배우라는 독특한 포지셔닝은 그의 말투ㆍ행동이 빚어낸 결과물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