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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이란 서랍을 열게 하는 키워드, 복고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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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호 30면

예전에 어머니가 사용하던, 어린 시절 내가 많이 보아왔던 디자인은 어딘지 모르게 정겨운 느낌을 준다. 추억의 군것질 세트에 열광하는 이유가 부모님 몰래 침을 발라 뽑기에 열중하던 코흘리개 순진한 내 모습이 떠오르기 때문인 것처럼 말이다. 같은 이유로 양철 도시락 통에 계란과 볶음김치만 넣은 추억의 도시락 메뉴에 괜스레 맘이 동한다. 패션에서부터 붐을 타기 시작한 복고는 감성을 자극하는 키워드로 자리 잡으면서 생활 전반에 스며들고 있다.

박소희 리포트

글로브 트로터의 여행용 가방들.

사실 복고의 의미는 뭐라 정의하기 힘들 만큼 무척이나 넓다. 50대에게 복고는 나팔바지가 유행하던 1960~70년대의 비틀스와 윤복희요, 30대들에게는 레깅스 패션과 뿔테 안경의 마돈나, 스키니 진의 마이클 잭슨이 떠오를 수 있다. 그래도 공통분모는 있다. 그 시절 자신들이 열광했던 기억을 아련히 떠오르게 한다는 점. 패션 디자이너들은 복고를 활발히 활용한다. 30년대의 밀리터리 룩과 60년대의 재클린과 모즈룩 등 시즌마다 각 시대의 복고 이미지에서 영감을 받아 새로운 컬렉션을 선보인다.

패션이 10년, 20년 단위로 복고를 나눌 만큼 세분화되어 있다면 리빙 파트는 복고를 시대별로 나누기보단 대부분 50년대부터 80년대까지의 분위기를 지칭한다. 특히 인테리어에서 레트로 스타일이라 하면 옛 필름 속에 등장했던 따스하고 인간적인 느낌의 것을 말한다. 패턴이 강하고 컬러풀한 색채를 사용하면서도 편안한 디자인이 특징이다. 디자인은 심플하되 고급스러운 가죽이나 패브릭으로 멋을 더한 제품이 많다. 또 복고의 영향을 받아 섀비시크(shabby-chic: 낡음을 뜻하는 ‘shabby’와 세련됨을 뜻하는 ‘chic’가 결합된 것) 스타일도 인기 반열에 들어섰다. 칠이 벗겨졌거나 헌 듯한 데에서 멋을 느끼는 것으로 일부러 낡게 제작해 세월의 향기를 입힌다. 가죽 소파나 화이트 컬러의 가구에 워싱 처리해 표현한 가구들이 대표적이다.

토마스 마저사에서 만든 원목의자. 사진 제공 햄튼

인테리어 쪽에서 복고의 향기를 맡을 수 있는 곳은 당연히 복고 이미지를 담은 공간이다. 홍대 앞 ‘다방(d’avant)’이라는 작은 커피숍. 적어도 스무 살은 먹었음 직해 보이는 의자와 탁자가 감성을 자극한다. 물 컵과 포크는 물론 작은 소품에 이르기까지 모두 70년대풍의 그것과 흡사하다. 요즘 떠오르고 있는 가로수 길. 이곳에 얼마 전 입고식을 마친 ‘이그제시스 드 시틸아이(Exercices de Style I)’라는 숍도 복고풍 기운이 가득한 공간이다. 40년대의 컬러풀하고 화려한 패턴의 프랑스 벽지는 이제는 생산이 중지된 월페이퍼로 희귀성까지 더해져 눈독 들이게 만들고 복고적인 프린트를 이용한 아이들의 의류나 몇 십 년 된 아이들 장난감과 같은 제품은 그냥 지나치지 못하게 할 만큼 특별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사람들이 잠시나마 복잡한 생각을 접어두고 따뜻한 옛 추억을 느끼고자 이러한 공간을 찾아가는 추세다.

2월 27일 압구정동의 한 클럽에 들어서자 미니스커트와 모즈룩을 입은 여성들이 눈에 띈다. 60년대 당시의 다양한 공연 포스터와 마치 그 시절 클럽에 온 듯한 분위기로 복고 내음이 물씬 풍기는 것도 모자라 60년대의 아이콘이었던 윤복희의 공연과 다이애나 로스의 노래를 부른 바다까지 합세해 한껏 흥을 돋웠다. 이것이 단순한 파티가 아닌 ‘복고’라는 컨셉트 아래 선보이는 모토로라의 최신 모델 휴대전화 론칭 행사라면 믿겠는가?

아날로그적 감성을 일깨우는 복고라는 키워드는 최첨단의 전자제품에까지 손을 뻗쳤다. 디자인의 최전방에 있는 자동차, 그중 BMW의 미니가 대표적인 예다. 59년에 선보인 미니의 디자인과 정신을 이어받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지금의 미니가 출시되었을 때 대기자가 줄을 섰을 만큼 인기를 얻었다. 대시보드 중간에 클래식한 속도계를 배치했고 그 아래 파워 윈도와 도어 잠금 스위치는 50년대의 미니처럼 토글 스위치(아래위로 올렸다 내리게 되어 있는 복고 스타일 스위치)로 처리해 복고의 디자인으로 최첨단 전자장치를 포장했다.

과거 아날로그 라디오를 상기시키는 휴대용 오디오에서 착안해 디자인된 뱅앤올룹슨의 메오 사운드 3 시스템. 차가운 소리가 아닌 풍부하고 부드러운 소리를 만들기 위해 뱅앤올룹슨만의 첨단기술을 사용하면서도 클래식한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상기시키는 디자인을 적용했다.

또 하나, 복고의 물결에 합류한 새로운 아이템은 다름 아닌 러기지들이다. 샘소나이트에서는 레트로풍의 블랙 라벨 빈티지 컬렉션을 새롭게 선보였고, 한눈에 복고풍임을 느낄 수 있는 글로브 트로터(Globe Trotter)라는 이름의 여행가방도 한국의 트렌드 세터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1897년 영국에서 처음 제작되었으며 영국의 엘리자베스 2세 여왕과 윈스턴 처칠이 애용했다는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고. 가죽보다도 단단하며 동시에 알루미늄보다도 가볍다고 하는 벌켄 파이버라는 섬유소재로 만들어졌다고 하니 복고풍 의상을 입은 이들에게는 필수 아이템으로 떠오를 정도다.

4~5년 전부터 불어오는 복고의 바람은 생활 전반에서 피부로 느낄 만큼 활짝 꽃을 피웠다. 복고는 감성을 자극하는 키워드다.

로보트 태권 V를 보며 그 시절 열광했던 기억들이 스쳐 지나가는 것처럼 누구에게나 있는 ‘추억’이란 서랍을 열게 하는 것이다. 잠시 복고가 떠오르다가 스멀스멀 시들 것 같진 않다. 최첨단의 시대가 다가올수록, 사람들이 정에 굶주릴수록 복고란 키워드는 화려한 날개를 펴고 우리 생활 속으로 자연스레 들어올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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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소희씨는 사람과 사회의 라이프 스타일 변화에 감각의 촉수를 뻗어두고 있는 패션ㆍ라티프 스타일 전문 프리랜서 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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