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력과 권위, 그 갈림길에서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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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호 03면

일러스트 이강훈 

실력대로 사는 게 좋을까. 아마도 맞는 얘기일 것이다. 자신의 실력이 또 다른 어떤 권위에 밀려 빛을 보지 못한다면 그는 세상을 원망하고 비탄에 빠지게 될 것이다.

그러나 최근 초단(初段)들의 융단폭격으로 피멍이 시퍼렇게 든 바둑동네의 대가(大家)들을 바라보면 마치 못 볼 것을 본 것 같은 안쓰러움에 사로잡히게 된다. 프로생활 석 달밖에 안 된 햇병아리가 타이틀 보유자를 연파하는가 하면, 아예 기업에선 조훈현 9단보다도 더 높은 대우를 받기도 한다.

조훈현 9단은 9단 중의 9단이었고 일세를 풍미하며 ‘바둑 황제’의 칭호를 들었던 사람이다. 그는 지난해까지만 해도 한국리그 8개 팀에서 앞다투어 주장으로 초빙했던 사람이다. 하지만 그는 올해 이름도 생소한 배준희라는 초단에게도 밀려 팀에서 고작(?) 삼 장(三將·제 3그룹)을 맡게 됐다. 서봉수 9단은 아예 48명 엔트리에 들지도 못했다.

조훈현 9단이나 서봉수 9단은 이런 현실을 한마디 불평 없이 받아들이고 있지만 하루아침에 급락해버린 그들의 위상을 지켜보면서 단지 세월 탓만 할 수 없는 아픔을 느끼게 된다.

대가(大家)들의 고통

한 성악가가 “노래도 바둑처럼 시합을 거쳐 승부가 분명히 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전국의 내로라하는 성악가나 이름난 교수들이 토너먼트로 맞붙어 서열을 한번 매겨볼 수 있다면 말입니다”고 하소연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그런 아쉬움도 이해는 간다.

실력은 분명 내가 좋은데 대가 밑에서 항상 움츠리고 사는 신세가 억울하기도 할 것이다. 알고 보면 별 실력도 없으면서 이름만 높아 대가연하는 사람들의 콧대를 한번 꺾어보고도 싶을 것이다. 하지만 그 사람은 바둑계의 고통을 잘 모른다. 막 들어온 초단들에게 무차별 폭격을 당하며 순식간에 뒷전으로 밀려나야 하는 대가들의 고통 말이다. 음악동네나 미술동네가 바둑 식으로 맞붙는다면 살아남을 대가는 몇 명이나 될까.

그쪽은 예술이고 바둑은 승부가 아니냐고 반문할 수 있다. 농익은 대가들의 경지를 어찌 강퍅한 승부와 비교할 수 있느냐고 말이다. 그러나 바둑도 지난 수천 년간 예도(藝道)로 행세해왔다. 바둑에 입문한 소년들이 승부, 즉 이기고 지는 것에 연연하면 스승으로부터 불호령이 떨어졌다.

대가들의 권위는 단위로 지켜졌다. 예부터 9품계가 존재했는데 9품계의 가장 밑인 초단은 수졸(守拙)이라 부르고 9단은 입신(入神)이라 불렀다. 근근이 지킬 줄 아는 초단과 신의 경지라는 9단 사이엔 하늘과 땅 같은 차이가 있었다. 그런데 최근에 와서 갑자기 9단들을 한칼에 제압하는 무서운 초단들이 대거 등장하면서 바둑계는 정신적으로도 크게 혼란에 빠져들고 있다. 한상훈 초단은 2006년 12월에 프로의 관문을 뚫었다. 그는 수습기간을 거쳐 3월부터 대회에 참가하기 시작했는데 이후 성적이 12승1패로 전체 프로기사 중 최고 승률(92%)을 보이고 있다. 배준희 초단은 2005년 12월에 프로가 됐는데 최근 국수의 반열에 오른 윤준상 6단을 격침시켰다. 이런 예는 비일비재하다.

근근이 지킬 줄 안다는 수졸들이 입신의 경지에 올랐다는 대가들을 무 베듯 단숨에 쳐나가는 모습은 ‘수졸이 입신이고 입신이 수졸인가’ 하는 착각마저 들게 만든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스승 앞에 앉아 불호령을 들으며 배운 소년기사들이 전문기사(프로)로 입문하자마자, 화가라면 국전에 입선하자마자, 어떻게 대가들을 압도하는 초일류로 돌변하는 것일까.

선배들의 자업자득인가

사실 이런 현상은 대가들을 포함한 선배들의 자업자득이라 할 수 있다. 선배들은 프로(경쟁자)들이 많아지는 것을 꺼려 오랜 세월 진입장벽을 높였다. 50년 넘은 프로바둑계에서 프로기사가 고작 200명 정도에 그치고 있다는 사실이 그걸 증명해준다.

이렇게 입단 문턱의 병목이 심해지다 보니 경쟁은 점점 더 살인적으로 변했다. ‘만 18세’라는 프로 입단 시한을 넘겨 숱한 기재(棋才)들이 바둑판을 떠나야 했다. 지금 주가를 높이고 있는 한상훈 초단은 1988년 생. 지난해까지 입단하지 못하면 떠나야 했는데 아슬아슬하게 12월에 막차로 관문을 뚫었다.

곰곰 생각하면 이 또한 무슨 비극인가. 한상훈 같은 기재가 대회에 참가도 못해보고 바둑을 접었다면 말이다. 그보다 턱없이 약한 100명도 훨씬 넘는 프로들이 중환자나 80세 할아버지가 되어서도 대회에 나갈 수 있는데 말이다.

바둑동네에서 지금 벌어지고 있는 현상은 ‘대가’라는 존재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보게 만든다. 어떤 성악가의 자조 섞인 푸념이 아니더라도 바둑계와 같은 현상은, 진짜 고수들을 분별해내는 안목이 사회 전반에서 높아질 경우, 굳이 토너먼트 시합을 해보지 않더라도 어느 날 갑자기 예술ㆍ교육 등 전 분야에 확산될 수 있다.
실력대로 사는 게 좋은가. 좋고 나쁜 것은 따지지 말자. 아픔은 따르지만 결국 이런 흐름은 피할 수 없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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