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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혁재사진전문기자의네모세상] 홍주에 취한 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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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면

Canon EOS-1Ds MarkⅡ 70-200mm f8 1/750초 ISO 200

진도 들노래, 밤 물결이 기슭을 핥는 소리, 배중손네들 함성 소리는, 새벽 여섯 시 죽림포구에서 홍주 빛깔이 된다.

햇빛은 진도를 에우고 있는 숱한 섬을 물 아래서 밀어 올리고, 솔숲 사이를 지나 이윽고 하찮은 풀뿌리에서 보랏빛으로 지치(紫草)가 되었다가, 소주고리에서 끓어올라 이슬 붉게 맺힌다.

지치가 녹아들어 홍주는 붉다. 붉디붉은 술이다. 천년 전 용장산성, 남도석성에서 싸우던 이들은 무너진 성돌 틈새로 스며들거나 하늘로 솟아 사라지고, 술만 남았다. 박젓대 박종기네들, 조공례들, 김대례들 소리로 울고 있다. 홍주 내리는 허화자네 불 맛으로 타올라 오윤 목판화 위에 목마른 그을음으로 내려앉았다. 오윤은 허씨네들과 거의 마지막 삶을 살았다.

진도에는 두 가지 빛깔이 산다. 시베리아에서 동해안을 타고 흘러내린 소리는 진도에 이르러 마침내 빛이 다 바래서 희다. 빛을 다 섞어 희다. 시황포 찢는 씻김굿 소리 풀어내는 당골래들 소복으로 희다. 그 흰 빛깔에 떨어지는 삶의 생동하는 넋이 홍주요, 들녘소리다. 진도에는 삼별초와 소리와 진돗개와 파도만 사는 건 아니다. 진도에는 문경새재도 산다. 문경새재는 웬 고개인고 구부야 구부구부가 눈물이 난다. 그래서 진도는 홍주 맛을 아는 이들 가슴마다 서리어 산다.

오늘 진도는 뽑지 않은 배추가 억새인 양 서 있고, 굽이마다 대파들이 파빛으로 어둡다. 작파해 버린 농심이 쓰리게 붉다. 이 밤으로 홍주는 어느 골방에서 더욱 붉으리라.

새벽 바닷가 소나무들은 서로 중얼거린다.

귀로 들을 필요는 없다.

권혁재와 함께 가는 길 위에서-서해성(소설가)

* 박종기는 박젓대라 불린 피리와 소리 명인. 조공례, 김대례는 다 소리꾼. 허화자는 홍주 내리는 여인네. 오윤은 판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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