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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의 종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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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2004년 총선 이후 치러진 재.보선을 휩쓸다시피하면서 '고가(高價) 행진'을 거듭해 왔으니 '수익성'도 입증됐다. 단기매매에서 짭짤한 수익을 내는 것은 물론 엄청난 배당수익도 기대해 볼 만했다.

하지만 25일 치러진 재.보선으로 이런 전망에 빨간불이 켜졌다. 한나라당의 성장잠재력과 미래이익 실현에 대한 시장의 불신이 표면화됐다.

왜 그럴까. 결론부터 말하면 한나라당 주(株)는 '경기(景氣) 변동'에 취약했다. 정권심판론으로 승부했던 재.보선에선 연전연승을 하다가도 이슈가 소멸하거나 대선과 같이 급격하게 요동치는 큰 시장에선 변화의 흐름을 낚아채지 못했다. 그 발목을 잡고 있는 게 '대세론'이다.

'빅 2', 즉 이명박 전 서울시장과 박근혜 전 대표는 노무현 대통령과 각을 세우고 대결하면서 힘을 키웠다. 예전보다 살기 어려워졌다고 믿는 서민들은 '경제 대통령'을 표방한 이 전 시장에, 노 대통령을 좌파로 낙인찍은 보수세력은 박 전 대표에게 지지를 보냈다. 빅2의 높은 지지율 속엔 노 대통령 실정(失政)의 반사이익이 투영돼 있다. 반노(反노무현) 전선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치러진 재.보선에서 한나라당이 연전연승을 거듭할 수 있었던 이유다.

하지만 대선은 다르다. 신.구 권력이 교체되는 교차점에서 선거가 치러진다. '살아있는 권력'이라는 대통령은 대선을 정점으로 급격히 무력해져 힘의 진공 상태에 빠지게 된다. 이때부터는 대통령과 각을 세우고 실정을 비판한다 해서 표가 붙지 않는다.

지난 대선에서 이회창 후보가 DJ(김대중 전 대통령)의 실정을 비판, 각을 세워 대세론을 만들고도 뒤늦게 나타난 깜짝스타 노무현 후보에게 패한 것도 이 때문이다. 대세론의 함정이다.

한나라당은 대세론에 안주했다. '차떼기 당'의 기억을 망각한 채 공천을 대가로 한 금품 시비가 재연됐다. 대선 시장을 과점(寡占)하고 있는 이 전 시장과 박 전 대표는 민심 흐름보다 당내 경선에서의 우위 차지하기에만 몰두했다. 당내 경선만 통과하면 대통령 자리는 떼 놓은 당상쯤으로 여기는 자세는 오만함으로 비쳐졌다. 그러다 보니 미래를 놓고 경쟁하기보다 의원들 줄세우기, 경선 룰 유리하게 만들기 경쟁 같은 구태가 되풀이됐다.

선두주자인 이 전 시장은 네거티브 공세를 차단하는 데 급급한 나머지 미래의 어젠다를 설정하고 청사진을 제시하는 공격적 캠페인을 이끌지 못하고 있다. 실수하지 않는 데 중점을 둔 부자 몸조심하기를 연상케 한다. 소극적이다. 청계천 복원이나 한반도 운하 구상 정도를 내놓고 'CEO 대통령' 이미지를 선점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박 전 대표는 '후보 검증'에 지나치게 열을 올리고 있다. 이 바람에 스스로 5년간의 퍼스트 레이디 경험에서 익힌 국정 노하우와 폭넓은 외교인맥을 브랜드화할 수 있는 기회를 흘려보내고 있다. 스스로는 '현장의 인기'를 지나치게 과신하고 집착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최근 파이낸셜 타임스의 '세계 100대 브랜드 가치' 조사는 세계를 놀라게 했다. 구글은 7위에서 마이크로 소프트의 자리를 빼앗아 1위에 올랐다. 자동차업계의 제왕이던 GM은 76년 만에 도요타에 1위 자리를 내줬다. 승부의 세계에선 절대 강자도, 영원한 승자도 없다는 속설이 입증된 단적인 예다. 4.25 재.보선 뚜껑이 열리고 민심의 향배가 드러난 지금 빅2가 곱씹어봐야 할 교훈이다.

이정민 정치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