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가 산유국인가(사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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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우리나라처럼 기름을 펑펑 쓰는 나라도 아마 없을 것이다. 특히 휘발유 소비가 급격히 늘어나 한국이 마치 산유국이라도 된게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다.
정부 각부처 등에서 자가용 10부제 운행 및 승용차 함께 타기 운동이 벌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휘발유 사용량은 지난 1월 2백60만배럴로 1년전보다 무려 32%나 늘어났다.
작년 한햇동안에만도 2천8백50만배럴의 휘발유가 길에서 뿌려졌다.
이같은 소비량은 90년에 비해 25%나 증가한 것이다. 80년대 후반들어 최대의 증가율이다.
주택 난방용,또는 산업용 기름인 경유나 벙커C유의 소비도 대단하다. 한겨울 아파트에서 러닝셔츠 바람으로 지낼만큼 우리는 풍족하게 기름을 써왔고 석유화학·철강산업 분야의 사용량도 만만치않다. 작년 우리나라 원유수입액은 78억달러에 이르렀다. 제품까지 포함하면 1백억달러나 된다.
우리나라의 에너지 과소비현상이 좀처럼 치유되지 않는 것은 근본적으로 소비자들이 가격부담을 느끼지 않고 있다는데 있다. 지난 5년동안 석유류값은 명목가격 기준으로 보더라도 연율 12%나 내렸다. 같은 기간에 개인소득은 매년 10%나 늘어 낮은 유가가 기름소비의 폭발적 증가의 주요요인이 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기름 한 방울 나지 않는 나라에서 그야말로 기름을 물쓰듯 하고 있다. 휘발유 1ℓ값이 생수 2ℓ와 맞먹을 정도니 그말이 정말 실감나게 됐다. 에너지 과소비 현상의 위기를 피부로 감지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수치가 있다.
작년에 우리나라의 전체 에너지 소비증가율은 실질 경제성장률 8.4%를 능가하는 9%에 이르렀다. 어느 선진국에서도 아직 없는 일이다.
그래서 일본이나 대만은 한국의 경제력이 조만간 한계에 부닥칠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전망하고 있는 몇가지 요인가운데 하나를 에너지 과소비체제에 두고 있다.
최근 정부 및 산하 연구소 등에서는 기름절약에 매우 둔감한 우리의 체질을 고치기 위해 휘발유등의 가격 인상문제를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이같은 논의는 대통령선거를 앞둔 정부에 큰 짐이 될 뿐만 아니라 물가안정을 어렵게 할 것이라는 우려 때문에 일단 협의가 중단됐다.
현시점에서 정부가 취할 수 있는 가장 바람직한 대책은 보다 강도 높은 에너지절약정책을 펴나가는 일이다. 수송부문 뿐만 아니라 산업시설에 대한 기존의 절약대책과 함께 각종 세제·금융조치도 병행해서 실시해야 한다.
민간부문도 편할 때 어려운 시절을 생각해 기름을 절약하지 않으면 결국 정부가 가격대응으로 밖에 나올 수 없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실제로 산업용과 관련이 적은 휘발유의 경우는 과소비가 계속되면 우선적으로 가격대응이 불가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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