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엽, 부드러운 말 속에 칼을 감춘 사나이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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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SUNDAY 이승엽(31ㆍ요미우리 자이언츠)에게 새 동료 오가사와라 미치히로(34)에 대해 물었다. 남 얘기를 솔직하게 해주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음…. 옆에서 지켜보면서 깜짝 놀라고 있다. 정말 대단한 선수다. 기술ㆍ이론ㆍ정신 등 자기 세계가 확고하다. 많이 배우고 있다.”
요미우리는 지난 겨울 니혼햄 파이터스에서 뛰던 오가사와라를 영입해 4번타자 이승엽과 짝을 맞춰줬다. 나이 많은 오가사와라가 이승엽과 같은 4년 계약을 따낼 수 있었던 이유다.
무게 중심은 이승엽이다. 오가사와라는 퍼시픽리그 1루수 골든글러브를 다섯 차례나 차지했지만 요미우리에서는 3루수로 뛴다. 수비력이 조금 떨어져도 1루수는 이승엽이다. 이승엽은 올해 6억5000만 엔, 4년 총액 30억 엔을 받는 일본 프로야구 최고연봉 선수다. “오가사와라는 좋은 선수”라는 정도면 충분했을 것이다.

심장이 승부욕으로 불타도

이승엽은 겸양을 미덕으로 삼는다. 말로 우쭐거리지 않는다. 심장이 승부욕으로 불타도 입에서는 연기조차 피우지 않는다. 그의 말은 부드럽다. 자신을 낮춰 말해야 적이 없다는 사실을 잘 안다.
3월 25일 도쿄돔에서 열린 히로시마 도요 카프와의 마지막 시범경기. 히로시마의 왼손투수 가와치는 7회 말 1사 2ㆍ3루에서 3번타자 오가사와라에게 고의 4구를 던졌다. 뒤 타자 이승엽을 잡겠다는 뜻이었다. 이승엽이 오가사와라보다 왼손투수에게 약하다고 본 것이다. 이승엽은 헛스윙 삼진으로 물러났다. 속에서 천불이 났을 터였다.
이승엽은 오가사와라에게 다가가 40분 동안이나 대화했다. 감독이나 코치가 아닌 오가사와라에게 조언을 구한 것이다. 일본 기자들이 몰려들었다. 오가사와라는 이승엽을 배려해 “그냥 잡담을 했을 뿐”이라며 웃었다. 하지만 이승엽은 “왼손투수 공략에 대한 조언을 들었다. 많은 도움이 됐다”고 솔직하게 털어놨다. “오늘의 굴욕을 잊지 않겠다”며 상대에 대한 경고도 잊지 않았다.
이승엽은 늘 그래왔다. 자신보다 하나라도 나은 점이 있으면 상대를 인정하고 배우려 했다. 일본 생활 4년째를 맞은 이승엽은 여전히 고수들을 존중하고, 그 결과 그의 스윙에는 여러 고수들의 장점이 녹아 있다.
지난해 이승엽은 팀동료 다카하시 요시노부(32)의 타격을 보면서 “폼이 정말 예쁘다. 그의 독특한 폼을 닮고 싶다”고 했다. 이승엽처럼 왼손타자인 다카하시는 타격을 시작할 때 왼발 뒤꿈치를 1㎝ 정도 들었다 놓으며 중심을 이동한다. 이승엽은 다카하시처럼 하체를 움직여본 뒤 자신에게도 맞는 느낌이 들자 주저 없이 이 타법을 배웠다.

자신을 벼리는 무기

지바 롯데 마린스에서 뛰던 2005년에는 동료 후쿠후라 가즈야(32)의 조언을 받았다. 이승엽이 왼손투수의 공을 치지 못하자 후쿠후라가 다가와 “왼손투수의 몸쪽 공을 어떻게 치느냐”고 물었다. 이승엽이 한국에서 치던 방법을 설명하자 후쿠후라는 “손목을 일찍 덮지 말고, 우중간을 향해 쭉 빼봐라”고 했다. 이승엽은 “요긴하게 쓰겠다”며 고마워했다. 이후 이승엽은 왼손투수도 잘 공략하고 있다.

후쿠후라는 이승엽을 좌익수로 밀어냈던 롯데의 주전 1루수다. 둘 사이가 껄끄러울 수밖에 없었지만 이승엽은 먼저 고개를 숙였다. 결국 후쿠후라는 친구가 됐고, 이승엽은 곧 그를 넘어섰다.

그렇다고 무조건 듣기만 하는 건 아니다. 선동열 삼성 라이온즈 감독이 부담감을 떨치라는 뜻으로 “등 뒤에 있는 태극마크를 떼라”고 충고하자, 이승엽은 “한국 야구를 대표해 일본 무대에 섰다고 생각한다”고 정중히 받아쳤다.
지난해 상대 투수들이 머리 쪽으로 유인구를 자주 던지자 “더 이상 참지 않겠다. 고의라고 판단되면 내가 투수를 강하게 압박하겠다”고 말했다. 나약하게 보이는 것을 싫어한다. 이승엽의 화법은 경계선 위에 있다.

도쿄=김식 JES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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