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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책갈피] 외면받은 천년 제국 '비잔티움 진면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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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로마에 있는 콘스탄티누스의 개선문

비잔티움 연대기
존 노리치 지음, 남경태 옮김, 바다출판사
전 3권 672~852쪽, 2만8000~3만원

다양한 상품 구색을 자랑하는 역사 지식 백화점이 있다고 할 때, 뜻밖에 빠져 있는 명품이 바로 비잔티움 제국이다. 우리나라의 역사 소비자들이 사고 싶어도 살 수 없었던 그 비잔티움 제국이 신뢰할만한 저자와 번역자를 통해 우리 곁에 다가왔다.

비잔티움 제국은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수도를 옮긴 330년부터 오스만투르크에 멸망당한 1453년까지 1123년 동안 이어진 역사상 최장수 제국이다. 그러나 '로마제국 쇠망사'로 유명한 역사가 에드워드 기번은 비잔티움 제국의 역사를 '고대 그리스와 로마가 간직했던 모든 미덕에 대한 배신'으로 규정했다. 18세기 이후 서양의 주류 역사학계는 서유럽 중심의 역사 인식을 강화하면서 비잔티움 제국을 애써 외면하려 했던 것이다. 동방의 이슬람, 북방의 슬라브족, 서방의 게르만족 사이에 자리 잡아 다양한 문화와 종교를 인정하고 수용했던 비잔티움 제국이 서유럽인들에게는 마뜩찮았다고 할까.

그러나 비잔티움 제국의 마지막 황제 콘스탄티누스 11세는 오스만투르크와의 최후의 결전을 앞두고 이렇게 연설했다. "인간이 목숨을 걸만한 명분은 네 가지가 있다. 신앙, 조국, 가족, 주권이 그것이다. 이것들을 위해서는 누구나 죽을 각오를 해야 한다. 그대들은 위대하고 고결한 백성들이며, 고대 그리스와 로마 영웅들의 후손이다." 이 연설에서 볼 수 있듯이 비잔티움 제국의 시민들은 로마인으로 태어나 로마인으로 죽었고, 스스로를 늘 로마인, 로마제국으로 일컬었다.

천년 제국의 구구한 사연을 때로는 유장하게 그려내고 때로는 날카롭게 해부하는 지은이의 솜씨는 단연 일급이다. 대규모 정복이나 근본적인 개혁도 없었고, 강렬한 개성도 없이 조용하고 조심스러웠던 테오도시우스 황제에 대해, 저자는 조화롭게 안정적으로 제국을 다스리면서 큰 위험 요인이던 고트족을 제국 내의 평화로운 집단으로 탈바꿈시킨 외교술의 달인으로 평가한다. 더구나 그는 백성을 우선시하는 효율적인 정부와 종교적 정통성이라는 큰 목표를 줄기차게 추구하여 성공을 거두었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신뢰할 수 있는 조화와 안정의 리더십이라 할만하다.

한편 로마법을 집대성한 유스티니아누스 법전으로 유명한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밑에는 '백과사전적 지식을 갖춘' 최고 법무관 트리보니아누스가 있었다. 그는 '법을 팔아 자신의 이익을 챙겼고 돈을 준 사람의 요구에 따라 법을 마음대로 적용하는 인물'이었지만, 풍부하고 폭넓은 학식으로 사람들을 매료시켰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자신도 학문적 소양이 깊었지만 트리보니아누스 같은 인재를 알아보고 등용할 줄 알았다는 게 더 중요하다.

상세하고 친절한 지도, 연대표, 주요 인물 및 사건 부분과 풍부한 사진 자료가 이 책을 명품 역사책으로 만들어주는 빼놓을 수 없는 요소다. 우리의 역사 인식의 지평에서 사실상 공백에 가까웠던 부분을 채워 준 번역자의 노고에도 고마움을 표하고 싶다.

표정훈<출판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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