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모 국방/암살듣고 “이제 민주주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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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최검사장이 밝힌 사건당시의 상황/백범피살직후 수상한 「실세」움직임/한독당 간부 조사도 없이 구속/한각만 법원장 “정말로 싫은 일”/그날 총리 꿩사냥,대통령은 낚시/면책 알리바이 만든 느낌
노변호사는 90세를 넘은 고령에도 43년전 「역사」의 그날,현장과 순간들을 생생한 기억으로 되살려냈다. 타협을 모르고 원칙에 충실하고자했던 「대쪽검사」로서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방향으로 상황이 전개되고 일이 처리되어갔기 때문이다.
백범피살당시 서울지검 검사장이었던 최대교옹이 43년만에 털어놓는 증언을 통해 사건직후 만하룻동안 이승만 정권 「실세」들의 수상한 움직임과 사건조사과정 등을 재구성해 본다.
49년 6월26일 낮 12시50분쯤 최옹은 검찰청 정원을 산보도중 이완희 서울지검차장검사로부터 백범이 피살됐다는 보고를 받고 즉시 사건현장인 경교장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경교장을 에워싸고 있는 군인들이 『검사장이라도 보안상 출입시킬 수 없다』고 버티는 바람에 10분간 승강이를 벌이다 겨우 들어가 검시를 통해 「백범의 절명」만을 확인한채 쫓겨나다시피 나와야 했다(암살범 안두희는 이미 헌병대에 이첩돼 있었다).
검찰청에 돌아와 권승렬 법무부장관에게 연락,대책논의를 위해 함께 이범석 국무총리 집으로 달려갔다. 대문에 「수렵중」이라는 안내문이 붙어있고 하인들이 『꿩사냥을 나가 집에 없다』고 했다.
『겨울도 아닌데 6월에 꿩사냥이라니….』
의아스런 생각을 갖고 당시 「실세중의 실세」로 통하던 신성모 국방부장관 집으로 향했다.
신장관 집앞에는 경호원이 버티고 서서 『신장관이 몹시 아파 면회할 수 없다』고 했으나 『급한 일이니 반드시 만나야 한다』고 우겨 겨우 침실로 안내됐다.
누워있는 신장관에게 『백범암살은 보통일이 아니니 빨리 경무대에 알려 대책마련을 해야한다』고 건의했다. 이야기를 듣자마자 신장관은 병색이 전혀 없는 환한 표정으로 벌떡 일어나 『이제 진정한 민주주의가 됐다』는 의미있는 한마디를 내뱉었다. 함께 경무대로 갔으나 이대통령역시 아침부터 낚시를 떠나고 없었다.
당시 최고 권력자들이 암살을 이미 알고 책임을 피하려 외부와 연락을 끊고 있었던 것처럼 꾸미지 않았나 하는 느낌이 들었다고 최옹은 말한다.
당시 경찰청장도 백범암살과 경찰의 무관성을 입증하듯 일요일인 사건당일 오전 9시부터 난데없이 경찰간부들을 모아 놓고 치안회의를 하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 출근해 한각만 서울지방법원장으로부터 『암살사건과 관련,안두희를 배후종한 김학규 조직부장등 한독당간부 7명에 대해 살인교사죄로 구속영장을 발부했다』는 얘기를 전해들었다.
한법원장은 『김익진 검찰총장이 영장을 신청했었다』며 『정말 하기 싫은 일이었다』고 설명했다. 아무 조사도 하지 않고 증거도 없이 하루만에 백범의 추종자들을 암살범으로 몰아 구속한 셈이다.
더욱이 담당검사도 모르게 「검찰총장이 신청하고 법원장이 발부하는 초법적인 영장」이 세상 어느 나라에 있단 말인가. 김검찰총장에게 찾아가 『백범과 생사를 같이한 사람들이 백범을 암살하다니 말이 되느냐』며 『사건의 본질을 한독당 내분으로 왜곡시키려는 의도가 아니냐』고 따졌다.
이에 대해 김총장은 경무대쪽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저 영감(이대통령 지칭)이 망령이 들어 이런 짓을 했나보네. 최검사장 모르게 일을 처리하라고 지시해서…. 이번 한번만 양해해주게』라고 했다(최옹은 대꼬챙이 같은 성격으로 평소 경무대측의 청탁을 거절,미움을 사고 있었다).
최옹은 『저를 못믿으면 물러나겠습니다』고 말한뒤 검사장방을 나와 사직서를 내고 고향인 전북 익산으로 내려가 1주일간 머무르던중 최장관이 찾아와 사표를 반려하며 복귀를 종용,함께 상경했다. 최옹은 그러나 권력 주변의 청탁 압력등 혼탁한 분위기를 참을 수 없어 끝내 그해 11월 사표를 던지고 검찰을 떠났다.
사건발생후부터 그때까지 최옹에겐 단 한번도 백범암살사건을 조사하라는 지시가 없었고 안두희등 관련자들에게 접근할 수도 없었다.<이규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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