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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k&CoverStory] 소수의 매니어에게만 허락된 '액체 황금' 네가 컬트와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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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일 웨스틴조선호텔의 '주얼 오브 나파 와인 디너'에서 소개된 컬트 와인들. 가운데 것이 '할란 이스테이트'다.

분당에 사는 와인 매니어 A씨(42)는 요즘 가만 누워 있어도 절로 웃음이 난답니다. 꿈에도 그리던, 꿈속에서도 갖고 싶던 와인 한 병을 드디어 손에 넣은 까닭입니다. 그가 미국의 와인경매에 응찰, 어렵게 구한 와인은 '할란 이스테이트 1994년산'. A씨는 "150만원이 넘는 돈을 썼지만 아깝지 않다"며 "고흐 그림을 사놓고 밤새 들여다보며 기뻐하는 사람 심정이 바로 이럴 것"이라 했습니다.

할란 이스테이트는 미국 캘리포니아 산(産) '컬트 와인(Cult Wine)' 중 하나. 컬트 와인은 미국 상류층이 아이를 낳으면 그 이름을 어떻게든 구매자 명단에 올리려 안달한다는 '럭셔리 업계' 최신 블루칩입니다. 명품 와인 하면 프랑스 산부터 떠올리는 우리. 대체 컬트 와인이 뭐기에 월가 투자가들로부터 '금보다 낫다'는 평까지 들으며 세계 와인 매니어들을 잠 못 들게 하는 걸까요. 한.미 FTA 체결로 미국 와인에 대한 관심과 기대가 한껏 부풀어 오른 지금, week&이 그 남다른 세계를 살짝 엿봤습니다.

글=이나리 기자 <windy@joongang.co.kr>
사진=권혁재 전문기자 <shotgun@joongang.co.kr>

12일 오후 7시 서울 소공동 웨스틴조선호텔. 프랑스 레스토랑 '나인 게이트'에 장안의 내로라 하는 와인 매니어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오늘은 '주얼 오브 나파 와인 디너' 행사가 있는 날. 미국 캘리포니아주 나파 밸리에서 생산되는 컬트 와인 여섯 종류를 시음하는 자리다. 디너 참가비는 1인당 50만원. 그럼에도 자리는 꽉 찼고, 사람들은 9단계의 프랑스 정찬 코스 요리와 함께 말로만 듣던 와인들을 한껏 즐겼다. 네이버 와인 동호회원들과 함께 온 삼지무역 이창헌 대표는 "컬트와인을 맛본 건 이번이 처음"이라며 "아직 어린 와인들인데도 카리스마가 느껴지고 균형감이 남달랐다"고 평했다.

그러나 가격 대비 만족도에 대한 의견은 다소 엇갈렸다. 필로스투자자문 이종필 이사는 "할란 이스테이트 2000년산의 소비자가가 150만원, 다이아몬드 크릭 2003년산이 49만원이다. 그 정도 돈이면 보르도 최고급 와인 여러 병을 구매하는 게 낫지 않을까 싶다"고 했다. 사실 '그만한 값어치가 있느냐'는 '컬트 와인'이란 단어가 처음 등장한 이래 늘 있어 온 질문이다.

컬트 와인이란 지난 10년 사이 나파 밸리의 몇몇 와이너리에서 생산을 시작한 최상급 와인을 뜻한다. 소규모 농원에서 한정된 양만 생산한다 해서 부티크 와인이라 불리기도 한다. 프랑스 보르도 지방처럼 포도 품종 중 주로 카베르네 소비뇽을 이용하기 때문에 컬트 캡(카베르네 소비뇽의 준말)이란 별명도 갖고 있다.

1990년대 초.중반, 스크리밍 이글.할란 이스테이트.콜긴.셰이퍼 등이 최고급 와인을 잇따라 내놓자 와인 비평가들은 호들갑스러운 찬사로 이들을 맞았다. 특히 세계 최고의 영향력을 지닌 미국인 와인 평론가 로버트 파커가 그중 몇몇에 100점 만점을 주면서 순식간에 추종자들이 줄을 서기 시작했다. 여기 기름을 부은 것이 '돈이 있어도 살 수 없는' 이들만의 독특한 판매 시스템. 구매자 명단인 '메일링 리스트'에 이름이 올라야 구매가 가능하다. 회원의 사망.파산 등으로 결원이 생기길 기대하며 대기 중인 이들만 와이너리별로 수천 명. 개중에는 아예 리스트를 폐쇄해 버린 곳도 있다.

"만점 와인" 평가 극과 극 "알코올 폭탄"

와인수입사인 나라식품 신성호 본부장은 "생산량의 70% 가량을 이렇게 판매하고, 나머지 30%로 레스토랑.소매점 납품 및 수출을 감당하는 구조"라며 "시장에 풀리는 양이 극히 적을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소장을 원하는 컬렉터는 갈수록 느는데 구할 방법은 없으니 값이 뛸 수밖에. 소량의 수출.소매점 납품 와인은 금세 동이 나고, 어쩌다 경매에 등장하는 것들은 값이 출고가의 2~6배에 이른다. 빈티지(와인의 원료가 되는 포도의 수확연도)에 따라서는 한 병에 1만 달러(1000만원)를 호가하기도 한다. 희소성이야 말로 컬트 와인의 필요충분조건인 셈이다.

한 병에 1000만원 호가하기도

그런 만큼 수백 년간 최고급 와인의 자리를 독차지해 온 유럽 와인업계의 속내는 복잡할 수밖에 없다. 와인경매회사 '아트옥션'의 조정용 대표는 "알코올 도수가 상대적으로 높은 컬트 와인을 '알코올 폭탄'이라 폄훼하거나, 시장에서의 높은 평가를 절묘한 마케팅의 결과로 깎아내리는 이들이 적지 않다"고 말했다. 포도플라자 김혁 관장은 "하지만 몇몇 컬트와인들이 어느새 보르도 와인에 필적할 만한 격을 갖춘 것은 사실"이라며 "또한 와인에는 맛 이상으로 중요한 매력.자긍심.개인적 즐거움이란 요소가 있고, 이를 종합적으로 판단해 값을 정하는 건 결국 소비자"라고 말했다. 조 대표 역시 "와인은 태생부터 계급적"이라며 "최상급 와인은 이미 미술품처럼 열광적 수집의 반열에 오른 만큼 맛만을 객관적으로 비교.검증하려는 시도는 종종 한계에 부딪힌다"고 덧붙였다.

미국 와인 시장의 급성장도 컬트 와인 바람에 큰 몫을 했다. 현재 세계 최대의 와인 경매 시장은 뉴욕. 특히 미국의 신흥 갑부들은 와인 수집에 강한 집착을 보이고 있다. 지난 2월 2일자 뉴욕타임스는 "요즘 미국 최고 부촌 중 하나인 캘리포니아주 실리콘밸리 아서턴에선 와인 도둑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며 이를 '가장 캘리포니아다운 범죄'라 규정했다. 와인 전문가인 데이픈 더븐은 이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컬트 와인은 일종의 유통화폐"라며 "도둑들은 갈수록 가치가 떨어지는 달러보다 와인을 소장하는 것이 더 안전하다는 믿음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개인 간 주류를 사고팔 수 있는 서구 사회에서 고가 와인은 오래 전부터 '액체 황금'으로 불리며 중요한 재테크 수단이 되어 왔다.

"미국 부촌엔 최근 와인 도둑 기승"

우리나라에도 와인에 '꽂힌' 이들이 갈수록 늘고 있다. 서울 청담동에서 레스토랑 '팔레 드 고몽'을 운영하는 서현민 대표는 자타가 공인하는 와인 매니어다. 수입의 상당액을 와인 컬렉션에 쏟아붓고 있다. 와인 리스트가 중요한 고급 프랑스 레스토랑의 운영자이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서 대표는 "8000병 정도를 수집했다. 그중 컬트 와인은 약 50병"이라고 했다. 서 대표는 "와인 수집에는 대단한 중독성이 있다. 나는 이미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넜다"며 "귀가해 와인을 못 보고 못 마시면 마치 자식을 못 본 것처럼 아쉽고 서운하다"고 말했다.

이런 매니어적 열정은 컬트 와인을 만들어내는 나파 밸리 와이너리 소유자들에게서도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것이다. 김혁 관장은 "컬트 와인은 워낙 소량이라 큰돈이 되지 않는다"며 "세컨드 브랜드 등을 만들어 판매 확장을 꾀하고는 있지만 그 자체가 와이너리 소유주들에게 큰 부를 가져다 주지는 못할 것"이라고 했다. 그들에게 중요한 건 오히려 와인 그 자체, 혹은 삶의 여유와 명예일 수 있다. 한 와인수입업체 사장은 "컬트 와이너리 소유자 중에는 부동산.리조트 사업 등으로 거부가 된 이들이 많다"며 "때문에 컬트 와인의 미래를 어둡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했다. 이들의 자녀.손자 대에 이르면 와인에의 열정이 식어 결국 '돈 안 되는 최고급'보다는 '돈 되는 대량 생산' 쪽으로 방향을 틀지 않겠느냐는 추측이다.

우리나라 와인 매니어 사이에도 어느새 '머스트 헤브(must have) 아이템'으로 부상한 컬트 와인.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는 "현대인은 타자와의 구별 짓기(distinction)를 향한 욕망에 조종당하고 있다"고 말했다. 컬트 와인이야말로 소비를 통한 구별짓기의 최전선에 있는 무엇이 아닐까. 그럼에도 그저 '보여지는 것'만이 중요치는 않은. 와인은 때때로 온전히 나만을 위한 무엇, 일인 축제에 바쳐진 신주(神酒)이기 때문이다.

*** 바로잡습니다

4월 20일자 위크앤 섹션(W1면) '네가 컬트 와인?' 기사 중 웨스틴조선호텔 프랑스 레스토랑 '나인 게이츠'는 '나인스 게이트'를 잘못 표기한 것이기에 바로잡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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