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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체제 수호의 첨병-유정회 출범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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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72년 12월 23일 저녁.
서울 종로구 필운동174번지 육인수 의원 집에서는 가족끼리의 조촐한 축하모임이 벌어졌다. 참석자는 박정희 대통령부부와 대통령의 장모 이경렁 여사, 손위 처남 육 의원, 처조카사위 장덕진 의원(공화·영등포-갑), 근혜·근영양, 지만군 등 세 자녀, 대통령의 군 동료인 민기식 의원(공화·청원), 육 의원의 딸 부부 등이었다.
이날 통일주체국민회의는 박정희 후보를 제8대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재적대의원 2천3백59명 중 2전3백57명이 찬성표를 던졌다.
『혼자 나오니까 심심해.』
식사 후 남자들끼리 따로 가진 술자리에서 박대통령은 육군참모총장출신의 민의원에게 느닷없이 한마디 툭 던졌다. 이날 식사 중에도 대통령은 그다지 밝은 표정이 아니었다고 민씨(71)는 기억했다.『혼자 씨름한 것 같애』라고도 말한 대통령의 안색은 왠지 고적해 보였고, 따라서 주흥이 고조될 분위기도 아니었다.

<혼자 씨름한 느낌>
『그날 우리들이 술을 잘 안 마신다고 각하께서 큰잔에 술을 가득 부어 돌렸던 기억이 납니다』고 동석했던 장덕진씨(58·현 대륙연구소회장) 는 회고했다. 이날 선거가 겉치레에 불과한「가짜대통령(민씨의 표현)」을 뽑는 선거였다는 것을 박대통령이 몰랐을 리 없었다. 명분이야 어떻든 민주주의의 기본에서 한참 벗어난 선거였고, 우리 헌정사의 가장 어두웠던 한시대의 궤적이 이미 찍혀지기 시작한 즈음이었다.
이때까지의 대통령선거에서 박정희 부보는 각각 15만6천표(63년 5대, 대 윤보선), 1백16만 표(67년 6대, 대 윤보선), 94만6천 표(71년 7대, 대 김대중) 차이로 상대후보를 힘겹게 물리쳤었다. 그러나 유신 직후 이른바「통대선거」는 박대통령의「상대 없는 씨름」이었다.
이듬해인 73년 2월 제9대 국회의원선거(2·27총선)가 시행됐다. 총선을 맞이해서도 야당인 신민당은 유신의 서슬에 짓눌려 감히 제 소리를 내지 못했다.
「민주헌정의 지향」「불법 부당한 침해로부터의 민권보장」같이 극치 추상적인 공약들이 신민당이 낼 수 있는 목소리 강도의 상한선이었다.
총선 결과 총1백46석의 지역구의석은 민주공화당 73석, 신민당 52석, 민주통일당 2석, 무소속 19석으로 갈라졌다. 지역구의석을 뺀 73석(의원정수 2백19명의 3분의1)은 두말할 것도 없이 대통령이 따로 추천할 후보들의 몫으로 남겨져 있었다.
「유신」이라는 말은 당초 박대통령이 생각해냈어요. 아마 일본의 메이지유신에서 착안했을 겁니다. 대통령께서 하루는 최규하 외교담당특별보좌관을 부르더니 유신이라는 단어를 말씀하시면서 그 전거를 찾아보라고 지시했습니다.』
김정렴 전 청와대비서실장의 증언이다.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최규하 특보는 옥편과 한적을 꼼꼼히 뒤적여 그럴듯한 자구들을 찾아내 보고했다는 것이다.
「주수구방 기명유신(주는 비록 오래된 나라이나 그 명운은 새롭다 시경)」같은 글귀는 그후 중·고교의 교과서에 반영되기도 했다. 신 모 화백의 유명한 유신홍보 만화와 함께.
총선 직후인 73년 3월 1일, 나중에「유신정지회」라는 원내 제1의 교섭단체를 구성하게 되는 대통령 추천 국회의원후보의 영입작전이 시작됐다.

<당정 감시 잘하라>
김정렴 전실장의 말.
『비서실과 중앙정보부·공화당이 각각 추천케이스 의원후보들을 물색한 결과 최종적으로 사회 각계에 걸쳐 1백 명 가량의 유력 인사 명단이 박대통령에게 보고됐습니다. 물론 비서실이 명단을 정리·취합·보고했고 낙점은 대통령이 직접 했습니다. 후보에 대한 연락도 비서실이 담당했는데, 직능별 특성을 감안해 군 출신인사는 국방부장관, 대학교수는 문교부장관, 경찰출신은 내무부장관, 중앙정보부 간부는 정보부장, 검사는 검찰총장이 개개인에게 통보하는 식으로 다른 부처에 맡기기도 했습니다. 학자·언론인·국회의원들은 친소관계나 인물의 비중에 맞춰 주로 비서실이 직접 연락했어요. 김종필 국무종리· 김진만 의원·김재순 의원같이 격이 있는 분들은 내가 직접「각하의 뜻」을 전했지만 웬만한 언론계 인사들은 김성진 청와대대변인이, 이북출신들은 홍성철 정무담당비서관이 통보하는 식으로 되도록 수석비서관들을 활용했지요.』
김 전 실장은『사전에 낙점을 받은 인사들을 설득, 수락시기는 과정에서 단 한 사람도 거절하는 이는 없었다』고 증언했다. 매우 흥미로운 대목이다. 73년의 1기 유정회 의원은 예비후보 14명을 제외하고도 모두 73명이었다.
한가지 특이한 것은 당시 박대통령이 대단한 집념을 갖고 추진했던 새마을운동의 일선지도자들이 한 명도 추천되지 않은 점이었다.
『그 즈음 공화당이나 내무부에서는 새마을 지도자나 4H클럽 회원들을 정계에 진출시켜 여권의 농촌 기간조직으로 활용하자는 건의가 여러 차례 있었습니다. 유정회 의원 인선 때도 마찬가지였지요. 그러나 대통령의 입장은 단호했어요.「농촌지도자가 정치바람을 타면 앙숙 관계를 만들기 쉽다. 농민 잘살기 운동이라는 새마을운동의 본령은 결코 훼손될 수 없다」는 이유로 절대 반대였지요.
김 전 실장에게는『혹시 행정부나 당에서 새마을·4H조직을 건드리지 않는지 잘 감시하라』는 별도지시까지 떨어졌을 정도였다. 그 즈음 한 청와대 민정비서관이「4H클럽을 공화당 청년조직으로 삼아 자금을 대주면 큰 힘이 될 것」이라는 내용의 건의를 박대통령에게 했다가 혼 줄이 났다.

<철저한 직능 위주>
『오랜 재임기간이었지만 박대통령께서 결재서류에 붉은 글씨로 지시사항을 적어 극도의 노여움을 표시한 경우는 딱 세 번이었어요. 오치성 신임 내무장관 때 내무부·경찰간부들이 사실상 4인체제의 사병 화되었다는 보고를 오 장관으로부터 받고는「철저히 조사해 시정할 것」이라고 붉은 펜글씨로 적고 사인을 했었지요. 나머지 두 번은 공화당이 건의한일선 새마을지도자의 입당건의, 4H클럽의 당 청년조직화 건이었습니다.(김 전 실장의 증언).
예나 지금이나 권력의 주변을 맴돌면서 격변기마다 고감도 안테나의 출력을 최대치로 높여 입신을 꾀해보려는 이들은 흔하다. 유신헌법이 공포(72년 12월 27일) 된 직후도 마찬가지였다. 유정회에 참여했던 한 인사는『1기 유정회 의원 인선을 앞두고 청와대·당·행정부 등 각계에 줄을 대는 이들이 무척 많았고, 덕분에 장안의 내노라 하는 점쟁이들 집은 문전성시를 이루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뚜껑을 연 걸과 유정회 의원의 인선은 비교적「직능위주」라는 원론에 충실했다.『절대권력자의 파워 덕분이라고는 하지만 소속계파나 헌금액수에 좌우되는 요즈음의 전국구위원 인선에 비하면 훨씬 이상적이었다. 지금 당장「인물」로 비교해도 자신 있다』는 당시 유정회 참여자들의 증언을 현재의 여야지도자들은 어떻게 받아들일까.-26면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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