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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 권력장악,남북분단 재촉(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48)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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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임시인민위」 설립/김,임정수립전에 북쪽 개혁 내세워/소 군정 간섭 안받고 독자 결행설도
모스크바 삼상회의의 신탁통치결정으로 비롯된 혼란이 조금씩 가라앉을 무렵인 46년 2월8일 평양에서는 매우 중대한 발표가 있었다.
당시까지 북한의 행정부역할을 하던 5도행정국을 폐지하고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이하 임시인민위)를 설치한다는 발표가 그것이었다.
위원회설치는 ▲임시정부수립에 앞서 필요한 준비를 하고 ▲북한을 민주기지로 만들며 ▲남한의 독립적인 행정기구(남조선대한국민대표 민주의원) 설치에 대응하기 위한 조치라는 부연설명이 있었다(남조선대한국민대표 민주의원은 미군정의 하지중장이 과도정부준비를 촉진하기 위해 구성한 자문기구).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같은 조치가 북한을 소련과 유사한 사회로 만들려는 움직임을 가속화시킬 것이며 남북은 결국 체제를 달리하는 사회가 될 것임을 예고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국내파들은 반대
곧 후속조치가 이어졌다.
토지개혁을 위한 대대적 조사가 긴급히 전개됐고 각종 법령은 사회주의적인 내용을 담는 방향으로 검토되기 시작했다.
사회주의 색채가 농후한 북한의 움직임은 남북의 거리를 급속히 벌어지게 했다.
아직 분단이 기정사실화되지는 않았지만 임시인민위 등장과 그 이후 북한에서 전개된 움직임은 남한의 맞대응과 맞물려 이미 빠른 속도로 닫혀져 가고 있던 38선의 문이 폐쇄되는 시점을 앞당겨 놓았다.
임시인민위가 태동되는 정치과정에 대한 전북한 고위관리 서용규씨의 증언은 이미 남북분단상태의 고착화가 예고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는 46년 6월 단정수립을 정식으로 밝힌 이승만의 정읍발언보다 앞선 것이어서 주목된다.
서씨의 증언.
『임시인민위의 필요성이 제기된 것은 46년 1월하순 열린 북조선 조직위원회 4차확대집행위원회 회의에서였습니다.
김일성이 5도행정국을 폐지하고 소비예트형 인민위원회를 만들 필요가 있다고 역설했습니다. 이때 임시라는 말은 안붙었습니다.
인민위원회가 필요하다는 논리는 이랬습니다.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에 따라 통일된 임시정부가 수립된다해도 북한에 민주기지를 만드는 일은 결코 지체할 수 없다.
임시정부수립뒤 민주개혁의 토대를 뒤집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는 중앙집권적인 정권기관이 나와 민주개혁을 완성해야 한다.
그러나 현재의 5도행정국은 집행기구라기보다는 협의·조절기구의 성격이 강하니 인민위원회를 만들어 개혁을 강력하게 추진해야 한다」는 것이었지요. 후에 민주기지론,혹은 근거지 창설론이라고 불리게된 이론적 입장이 이것입니다.
소군정은 그때까지 5도행정국이외의 어떤 기구에 대해서도 언급한 일이 없었습니다.』
김일성의 제안은 『북한개혁을 위해 임정수립이전에 인민위원회를 만들어야 한다』며 개혁에 초점을 맞추었지만 입북이후 줄곧 「헤게모니장악」에 온 힘을 기울였던 김일성의 행보 때문에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의 제안은 북한만의 단독정부수립을 통한 김일성의 패권장악기도로 해석될 수 있는 것이었다.
「조선공산당 당중앙의 지도아래 단정반대·통일정부수립」이라는 확고한 입장으로 거의 모든 사안에 걸쳐 김일성과 맞섰던 국내파의 반대목소리가 터져나왔다.
서씨 증언.
『김일성이 이같은 의견을 내놓자 반대의견이 무성하게 나왔습니다.
특히 반대에 앞장섰던 것은 오기섭·정달헌 등을 중심으로 한 국내파 공산주의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의 논리는 이랬습니다.
「45년 12월의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제3차확대집행위원회에서 분국을 공산당 북조선조직위원회로 바꾼 것 자체가 당을 남북으로 분열시킨 것이다. 그런 마당에 북한에 독자적인 정권기관을 만드는 것은 남북을 분열시키는 것이다.
통일된 임시정부가 나올때까지 5도행정국으로 끌고가면 될 뿐 아니라 곧 있을 미소공동위원회 회의(46년 3월20일 1차회의)에서 임시정부 수립문제가 구체화될텐데 굳이 무엇 때문에 서둘러 정권기관을 만들려 하는가」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은 인민위원회 수립은 나라를 분열시킬 뿐 아니라 그처럼 중요한 일은 서울중앙과 협의해서 결정해야 한다고 했지요.』
김일성과 국내파의 논쟁은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회의는 끝났다.
소군정도 김일성의 제의에 일단 부정적인 태도를 취했다.
○박헌영 몰래 추진
서씨에 따르면 소군정 스스로가 그같은 계획을 갖고 있지도 않았거니와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미소공위 첫회의를 앞둔 시점에서 인민위원회 수립이 몰고올 정치적 파급효과를 계산했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서씨의 증언.
『소군정측은 김일성의 이같은 제안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남북이 통일될 때까지 5도행정국이 과도역할을 하면 된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완전한 정권기관의 모양을 갖춘 인민위원회를 만드는데는 생각이 미치지 않았던 것으로 압니다.
심지어 허가이,이동화 등 소련파들도 5도행정국을 그대로 유지하다가 미소공위가 개최되면 임시정부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임시인민위 설치문제에 대해 김일성과 박헌영의 사전협의가 전혀 없었다는 것은 흥미있는 대목이다.
서씨는 『임시인민위 수립과 관련해 박헌영에게 일체의 통보가 없었다. 김일성은 3차회동인 46년 4월에 가서야 저간의 경과를 박헌영에게 설명했고 이때 박헌영은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거듭되던 논란은 김일성파의 의견으로 방향을 잡아갔고 소군정도 인민위원회 설치쪽으로 기울었다.
계속되는 서씨의 증언.
『4차확대집행위 회의에서의 빨찌산파,국내파,소련파들간의 논란은 회의 이후에도 계속됐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김일성측의 주장이 어느 정도 설득력을 발휘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소군정이 긍정검토쪽으로 방침을 최종 결정했고 이에 따라 인민위 수립은 일사천리로 진행됐습니다.
논의과정중에서 위원회가 임시정부수립 이전의 과도적 기구라는 점을 명백히 하기 위해 임시라는 용어를 사용해 임시인민위원회로 하기로 했습니다.
5도행정국을 만들때 소군정의 로마넨코,레베데프 등이 직접 지휘한 것과 달리 임시인민위 수립에 대해서는 소군정이 이래라 저래라 간섭하지 않았습니다.
○단정의 교두보로
그렇게 해서 46년 2월8일 평양에서 북조선 각 정당·사회단체,각 행정국 및 각도·시·군인민위대표 확대협의회가 열리게 된 것입니다.
이자리에서 김일성은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조직에 대하여」라는 보고를 통해 「우리가 임시인민위를 조직하겠다고 발기하니 소군정도 동의했다」며 그간의 경과를 설명했습니다. 위원장에는 김일성,부위원장에는 김두봉,서기장에는 강양욱이 선출됐습니다. 2월8일 대회가 열리게 된 것은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리기 전에 토지개혁을 하려는 비밀계획에 따른 것입니다.』
서씨의 이같은 증언은 「소군정이 임시인민위를 만들었다」는 전제하에 이루어졌던 많은 연구결과들을 뒤엎는 증언으로 주목된다.
그러나 김일성이 임시인민위를 만들기 위해 소군정과 미리 상의했고 그에 따라 서로 역할을 조정했을 가능성도 있다.
위원회가 만들어진후에 강행된 토지개혁등 소비예트형 사회개혁과 임시정부수립을 위한 미소 공동위원회 회의가 결렬된 것도 소군정이 북한만의 단독정부를 최종대안으로 염두에 두고 임시인민위를 교두보로 활용했을 가능성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아무튼 임시인민위 수립으로 김일성은 입북 6개월만에 당과 정권기관을 장악한 1인자로 등장하게 됐다.
이제 그는 공산주의자인 자신의 뜻대로 북한을 개조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됐다.
김일성이 소군정과의 상의아래 북한의 사회주의화를 위해 착수한 첫번째 조치는 토지개혁이었다.
□특별취재반
북한부 김국후 차장
안희창기자
유영구기자
안성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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