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운영 칼럼] 師父들을 나서게 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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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이 글은 창작이 아니라 '세계사 일급 비밀'(새날.1996)의 일부 번안이다. 1963년 8월 8일 오전 3시 글래스고발 런던행 우편열차는 종점을 40㎞ 앞두고 있었다. 12량 화차의 선두 두 칸에는 스코틀랜드은행이 잉글랜드은행에 맡기는 지폐와 유가증권 자루가 실려 있었다. 브리디고 다리의 신호등이 평소의 청색 대신 적색으로 번쩍이자 기관사는 급정거를 하고 차에서 내렸다. 선로 위의 수리반에게 "작업이 있다는 얘기를 못 들었는데"라고 말을 건넸다. 그 뒤의 스토리는 뻔한 것이었다.

*** 런던 열차강도 사건 아십니까

지금 무슨 소리를 하려는 거냐고? 세계사의 일급 비밀 아닌 한국 정치의 일급 토픽 얘기야. 사과 상자니, 승용차 트렁크니, 해외 계좌니 별의별 지혜를 다 짜내다가 드디어 트럭째 넘긴 사건 있잖아. 열차 습격이 아닌 정치자금 수납(輸納)이니, 오전 3시의 철로보다는 오후 8시의 고속도로 휴게소가 편했을 거야. 저치들은 억지로 신호를 바꾸고 부산을 떨었지만, 고속도로에는 신호등이 아예 없으니까. 시시껄렁한 소리 집어치우고 영국 얘기나 하라고?

10분 만에 기차가 털렸고, 25분 뒤에 모든 자루는 아지트로 옮겨졌다. 도난 규모는 2백63만파운드로서 현재의 가치로 1백50억원에 이른단다. 질겅질겅 밟히는 돈다발에 도무지 실감이 안 났던지 기껏 한다는 짓이 10파운드짜리 지폐로 담배를 말아 피우고, 마침 이날 생일을 맞이한 동료한테 각자의 몫에서 5파운드씩을 떼어 선물했다. 결국 잡히고 주범급에 30년 선고가 떨어지자 이번에는 여론이 돌아선다. 폭력도 없이 은행 돈 좀(?) 훔친 죄로 30년 징역이라니! 신사 강도의 기막힌 재주에 대한 호기심도 한몫했으리라. 돈독한 신심의 작가 그레이엄 그린이 신문에 공개적으로 "나는 그들의 뛰어난 솜씨와 용기를 칭찬한다"고 외친 것은 이런 정서의 연장이었을 터이다.

트럭에 실린 돈이 1백50억원이라니 사상 최대의 열차 강도가 우습게 되어버린 거지. 역시 우리 정치는 통이 커. 돈으로 담배를 말아 피워봤자 손해는 돈 찍어내는 종이와 물감 값 정도라고. 그러나 선거자금이 만들어내는 유권자의 타락과 정치적 해독은 '돈 담배' 따위에 비할 바가 아니지. 졸개들도 10만파운드를 받았는데 친구 생일 선물이 고작 5파운드라고? 이런 쩨쩨한 녀석들. 아직은 '카더라' 통신 차원이지만 이번 '차떼기' 사건의 배달 사고가 좋이 1백억원은 된다는 소문 아냐? 아 참, 대도(大盜)니 물방울 다이아몬드니 그거 기억나? 그때야 보석 주인에 대한 반감이 컸지만 이 일은 어떻게들 받아들일까? 아무리 신앙이 깊어도 돈 자루 수납(袖納)을 칭찬할 작가도 없고 신문도 없을 걸. 뭐, 손가락에 장을 지지겠다고? 30년은커녕 3년도 안 살고 나온다고? 에이, 그런 말 함부로 하지 말아. 하기는 저 녀석들도 기막힌 탈옥으로 또 한번 세상을 놀렸는데 그 얘기를 마저 끝내지.

돈에는 관심 없고 '도둑질 미학'에만 관심이 있는 사부(師父)가 있었다. 아직도 정체가 밝혀지지 않은 그가 '완전 범죄' 프로젝트를 만들어 조폭 두목들을 상대로 세일에 나섰다. 대부분 능력 부족을 탓하고 물러섰으나 007 수준의 부하를 여럿 거느린 레널즈 파가 대들었다가 일을 망친 것이다. 사부의 작전은 일호의 차착(差錯)도 없이 들어맞았다. 다만 그 일을 실행에 옮기는 것이 사람이라는 점을-사람은 잘못하기 십상이라는 점을-잊은 것이 잘못이었다. 예컨대 기관사와 경비원에게 "30분 동안 움직이지 마라. 서툰 짓 하면 쏜다"라는 말로 30분 거리의 아지트를 알린 실수라든가, 담배꽁초조차 장갑을 끼고 버리면서도 돈에 미쳐 돈 꺼낸 자루는 그대로 놓아둔 방심 따위가 그러하다.

*** '완전범죄'프로젝트 가능한가

이번 차떼기 작전이 들통난 까닭을 저는 모릅니다. 그리고 대선자금이 한쪽에만 가고 다른 쪽엔 얼씬도 않았는지, 수사 결과의 발표 순서나 시점에 무슨 의도는 없었는지, 측근 비리 수사와 대선자금 수사를 국민의 뇌리에 '물타기'하려는 것 아닌지 등등의 의혹에 대해서도 아는 것이 없다니까요. 다만 이런 절차상의 하자가 사태의 본질에 숱한 억측을 낳을지 모른다는 우려와, 검찰 수사가 이번만은 막후의 사부들을(!) 비켜가기 어렵다는 판세는 저도 읽을 만합니다.

정운영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