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보러가듯 유세장에 가보자/권영빈(유세장에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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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왜 알뜰주부는 매일처럼 시장엘 가는가. 집근처에 슈퍼마킷이 있고 가게도 있는데 굳이 시장까지 가는데는 분명 이유가 있다.고를 상품의 가지수가 많고 뜻밖의 신선한 생선이 선보이고 갓나온 봄나물이 구미를 돋우기 때문일수 있다. 좋은 물건을 싼값에 내눈으로 확인하면서 산다는 보람도 있다.
그 뿐인가. 어깨를 부딪히며 지나는 인파,상인의 호객소리와 수레꾼의 길을 비키라는 외침이 뒤섞여 울리는 시끌벅적함이 안겨주는 시장 특유의 열기속에서 삶의 냄새를 맡게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시장을 드나든다. 그래서 우리말은 언제나 「장보러 간다」고 표현한다. 물건을 살뿐만 아니라 구경하러가는 것도 중요한 일중의 하나가 된다.
○뜻밖의 신선한 풍경
이렇게 시장가듯 주말 유세장엘 가본다. 집안과 사무실에서 생각할 때와는 사뭇 다르게 경청할만한 말의 잔치가 있고 고를 만한 인물이 있으며 삶의 열기를 피부로 느낄수 있었다.
유세장에 가보지 않고 신문만으로 선거 기사를 읽을 때는 온통 선거판이 불법과 타락,그리고 폭력으로 난장판이 되어가는 느낌이었지만 직접 가본 유세장 풍경은 뜻밖에도 질서가 있었고 전과는 달라진 유권자들의 신선한 눈초리에는 마치 좋은 상품을 고르려 나온 알뜰주부의 기민함이 엿보였다.
부산 동구에는 5천명 이상의 청중이 모였고 대구 서갑구에는 2만명이상의 인파가 붐볐지만 단 한건의 폭력도 없었다. 질서정연하게 입장했고,유세가 끝난 자리에 흩어진 전단과 신문더미를 선거운동원이 앞장서 줍고 있었다.
여권 후보 연설이 끝나면 썰물처럼 빠져나가는게 종전 유세장 풍경이었지만 이번 유세장은 그렇지 않았다. 막판 무소속후보의 신파조연설에도 귀기울이며 박수치고 장단 맞추며 뒤풀이 흥을 아쉬워했다.
그중에는 동원된 청중도 있을수 있고 일당에 팔려온 사람도 있겠지만 그 숫자가 몇이겠는가. 청중의 대부분은 자의에 따라 상품을 고르려 나온듯 했고 후보의 연설을 자세히 듣기위해 스피커의 방향을 따라 자리를 잡고자 했다.
지금까지의 신문보도가 공명선거를 강조한 나머지,지나치게 부정적 측면만을 강조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감시자나 계도자의 역할을 강조한 나머지,바뀌어지고 있는 선거현장의 긍정적 분위기를 놓치고 있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본사의 선거취재 방향이 현장과 너무 거리가 있어요. 산업인력이 선거인력으로 빠지는 기사를 보내라 하지만 있어야 보내지요. 선거폭력·향응사례 등을 취재하라지만 특별한게 없어요. 지시를 따르자니 작은 일 부풀릴수 밖에 없고….』
어느 지방주재 젊은 기자가 터뜨리는 불만중의 하나다.
○뭔가 달라지는 기미
『신문 24면이 온통 선거기사로 도배하고 있지만 정작 읽을게 없어요. 요즘 돈있다고 뿌리는 멍청한 후보가 어디 있습니까. 선거 한번 치르지않고 쇠고랑차려는 바보없고 기자 등쌀때문에 뿌리고 싶어도 못뿌려요. 이런 실정인데도 금권선거 운운하니….』 한 여권후보의 안타까운 호소다.
불법·탈법막자는 언론 캠페인이 결과적으로 주효한 탓이긴 하지만 이제부턴 선거의 부정적 측면보다는 긍정적 측면을 부각시키는 쪽으로 보도자세를 바꿔야 한다는 생각이 굳어졌다.
YS와 TK라는 정치바람이 자리를 잡고 있다는 경남·북,그중에서도 핵심인 부산과 대구라 해도 그 지역에서도 미세하나마 변화의 바람은 불고 있었다. 5공의 핵심이었다고 감점을 주는 것도,6공의 실세라고 꼭 후한 점수를 주는 것도 아니라는 인상이었다. 저변에 깔려있는 현 정권에 대한 불만이 YS와 TK라는 무의식적 강박관념때문에 희석되기보다는 좋은 상품이면 바로 사겠다는 쪽으로 작용하는듯 했다.
큰 인물이면,지역발전을 위한 인물이라면 정당과 바람을 의식하지 않고 찍겠다는 의식이 미세하나마 일고 있다는 사실이 뜻밖의 혼전 예상지역이 갈수록 늘어난다는 현상과 무관치 않다고 본다. 특히 경북지역에서 민자당이 고전을 면치 못하는 지역이 늘고 있음은 13대와는 뭔가 달라지는 기미를 엿볼수 있다.
결국 정당이 아닌 인물 중심의 투표성향이 경남·북에 두드러진다는 현상은 정책대결이 아닌 인기위주의 인물 대결 구도로 이어질수 있고 막판 선거에서는 상호 비방과 흑색선전이 난무할 조짐도 예상할 수 있다.
『노사분규현장이나 드나들며 거액을 챙기고 부동산 투기로 치부했다는 인사가…』라는 인신공격에 『총잡이는 동부가 아닌 서부로 가라. YS를 대통령 병자라고 하더니 지금와선 위대한 지도자냐』는 반격이 이어진다. 유세 첫날의 이런 공방은 애교라고 봐주겠지만 막바지에 이르면 어떤 험담과 비방이 쏟아질 것인지 예측할 수 없을 것이다.
정책대결이 아닌 인물대결이라는 변화된 선거판일수록 유권자가 할 일은 하나밖에 없다. 전달된 선거홍보물도 참고가 되겠지만 후보의 인물 됨됨이와 그들의 경륜과 정책의지를 확인하는 길은 시장가듯 유세장에 가보는 일이다.
○불량후보 솎아내야
시장에서 물건을 사고 파는 상행위가 경제거래의 첫걸음이듯,유세장의 언어교감이라는 정치행위가 정치거래의 시작인 것이다.
불량 상품을 사지않듯,불량 정치인은 우리 손으로 솎아내야 한다. 그 길이 경제를 바로 세우는 첫걸음이듯,우리 정치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는 지금 당장 유세장으로 발걸음을 내디뎌야 할 것이다. 유세장 한번 가지않고 「우리 정치 개판」이라고 불평하는 사람이 있다면 바로 그 사람이 「개판」을 만든 장본인임을 우리 함께 기억하자.<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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