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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크 배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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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김진국
김진국 기자 중앙일보 대기자·칼럼니스트
남북전쟁 전 미국의 남부 농장. 돼지를 잡으면 주인은 좋은 부위만 챙겼다. 나머지는 통에 집어넣고 절여 노예들에게 한 조각씩 던져줬다. 노예들은 돼지고기 통 주위로 몰려들었다. 노예제는 폐지됐지만 아직도 이런 광경이 남아 있다. 연방예산을 끌어들여 지역구에 선심을 쓰고, 표를 얻으려는 의원들이다. 이것을 '포크 배럴 정치(pork barrel politics.정치적 선심 공세)'라고 한다. 돼지고기 조각과 표를 바꾸는 것이다.

미국 대통령들의 거부권 행사가 많은 것도 이 때문이다. 역대 2551건. 4선을 한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무려 635번, 클리블랜드도 584번이나 거부권을 행사했다. 이 중 상당수가 예산법안이다. 빌 클린턴 대통령이 거부한 37건도 대부분 '포크 배럴 예산'이었다.

로마 호민관은 원로원이 만든 법을 비토(거부)할 수 있었다. 미국의 대통령도 그런 권한을 받았다. 미 의회가 법안을 넘기면 10일 이내에 이유를 달아 발의 의원에게 돌려보낼 수 있다(환부 거부). 의회가 다시 의결하려면 상.하원 3분의 2가 찬성해야 한다. 의회가 휴회 중이어서 10일 이내에 돌려보낼 수 없다면 그냥 폐기할 수 있다(보류 거부). 재의를 못 한다고 '절대적 거부', 대통령이 주머니에 넣어버린다고 해서 '포켓 거부'라고도 한다.

한국에서는 15일 이내에 거부권을 행사해야 한다. 보류 거부나 '부분 거부(line-item veto)'는 허용되지 않는다. 재의결 요건은 재석 3분의 2의 찬성. 제헌국회 이후 거부권이 행사된 것은 67번. 이승만 대통령이 거부한 양곡매입법안 등 45건은 대부분 재의결됐다. 1961년 4월 이후 국회에서 원안이 재의결된 것은 노무현 대통령의 측근비리 특검법이 처음이었다. 박정희 시대에는 거부권을 행사한 것이 겨우 4건. 국회를 확실히 장악했기 때문이다. 여소야대가 된 노태우 정부 때 7건이 거부돼 모두 수정의결됐다.

최근 노 대통령이 거부권 행사를 검토한다고 한다. 국민연금법 개정안과 한 묶음인데 따로 통과돼버린 기초노령연금법 때문이다. 65세 이상 노인 60%에게 세금으로 매달 8만9000원씩 주겠다고 한다. 한나라당은 한술 더 떠 80%에게 18만원씩 주도록 다시 고치겠단다. 돼지 비계 나눠 주기 세금 잔치에 누구 등골이 빠지는지는 모르쇠다. 다행히 6정파가 이달 중 국민연금법을 고치겠다니 지켜볼 일이다. 바로잡지 못한다면 이것이야말로 거부권 대상이다.

김진국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