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14번이나 외면당한 구조요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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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마지막까지 희망이어야 할 112와 119가 절망의 숫자로 변했다. 불법 체류자인 중국동포 김원섭씨가 열네번이나 구조요청을 했으나 끝내 서울 도심에서 동사했다는 사실은 우리 사회의 마지막 등불이 꺼져간다는 위험신호다.

영하 4.1도의 추위 속에서 서서히 생명이 꺼져가는 것을 느끼면서도 3시간10분 동안 결사적으로 매달렸던 비상신고체계는 119에서는 112로, 112에서는 공중전화신고로 요구만 늘어놓았을 뿐,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았다. 환경미화원이 시신을 발견하기 불과 55분 전까지 112를 누르고 있었다는 사실은 그가 마지막까지 살기 위해 사력을 다했음을 보여준다. 더구나 숨진 곳도 경찰 순찰지구대와 지척이었다고 하니 경찰이 신고자를 찾아보려는 노력을 적극적으로 펼쳤던들 생명을 잃지는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金씨의 죽음을 슬퍼하면서 우리 사회에 만연한 생명 경시 풍조를 바로잡지 않는 한 비상신고체계도 무용지물일 수밖에 없음을 지적하고자 한다. 119 구조대와 112신고센터 관계자들은 횡설수설해 위치 파악이 어려웠다고 하지만 각각 2~4분여 통화한 기록이 있음을 상기할 때 지극히 상투적 대응을 했다고밖에 판단할 수 없다. 나름대로 위치를 설명하고 '추운데 힘이 없어 집에 못간다'는 金씨의 말을 흔한 취객의 헛소리로 취급했다는 것이 그 증거다.

112에만 하루 평균 2천여건의 비상신고가 들어오고 그 대부분이 장난 전화이거나 사소한 일임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그러나 1백마리의 양떼보다 한 마리의 길잃은 양을 지키는 목자의 심정으로 항상 누군가 아주 위급한 상황에 놓인 것이라는 생각으로 업무에 임한다면 이번과 같은 불행한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 아닌가. 한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의식의 전환이 시급하다.

동시에 각 가정에서도 비상신고체계를 소중히 여기고 이를 지키려는 다짐을 확고히 해야 한다. 金씨의 억울한 죽음의 한 끝에는 비상신고체계를 조롱하여 결과적으로 느슨하게 만들어버린 우리의 탓도 크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