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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청의 변천과정:상(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41)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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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김일성 대중기반잡기 “물밑작업”/「분국」창설 발맞춰 빨찌산파가 주도/우익단체들과 곳곳서 격렬한 충돌
해방의 환희가 아직은 거리마다 짙게 깔려있을 무렵인 45년 9월중순 비밀리에 평양으로 들어온 김일성은 즉시 권력장악을 위한 행보를 시작했었다.
권부와 대중 두 방향을 겨냥한 움직임은 거의 동시적으로 전개됐다.
박헌영과의 헤게모니 경쟁이 권부에서 벌어진 작업이었다면 대중을 향한 작업은 사회단체 장악으로 구체화됐다.
이중 사회단체 장악은 아직은 공산당으로 기울어지지 않은 북한의 대중을 지지기반으로 돌려세운다는 중요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었다.
대중조직화는 토착공산주의세력의 주도아래 모색되거나 틀을 어느 정도 갖추어 나가고 있던 각종 사회단체들의 주도권을 장악해 나가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해방직후 북한에는 여성동맹·직업동맹·농민동맹·공산주의청년동맹 등 각종 공산계열의 외곽단체가 윤곽을 갖추거나 혹은 초기모색의 단계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 단체가 훨씬 뒤 등장하는 북한정권의 본격적 지지기반으로 전환되기까지는 아직 거쳐야할 고비들을 남겨두고 있었다.
사회단체가운데 공산주의청년동맹(공청)의 결성과 전환의 과정은 특히 그랬다. 공청은 46년 민주주의 청년동맹(민청)이란 이름으로 확대개편된뒤 64년 5월 사회주의노동청년동맹(사로청)이라는 이름으로 정착돼 북한노동당에 인력을 공급하는 예비대가 된 단체다.
○청년지식층 규합
해방직후 등장한 각종 공산계열 단체가운데 가장 취약한 것이 공청조직이었으며 김일성의 외곽조직으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드러난 갈등이 가장 격렬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북한에서는 서울과 달리 공청운동의 전통이나 주도세력이 없어 공천건설움직임이 미미했었다.
북한의 공청은 김일성과 빨찌산세력의 입북과 더불어 비로소 가다듬어졌다.
빨찌산 그룹은 공청을 대중사이에서 자신의 영역을 확보해나가는 지렛대로 이용했다.
그리고 빨찌산파의 그같은 움직임은 갈등의 파장을 일으켰다.
북한 토착공산계열의 반격과 조선공산당의 견제,우익세력과의 투쟁이 공청건설을 축으로 서서히 가열돼갔다.
공청의 등장과 정착의 궤적은 동시에 진행된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의 그것처럼 극적인 것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의미있는 흔적을 남기고 있다.
공청의 기반은 분국등장을 연상시키듯 신속하고 비밀스러운 물밑움직임을 통해 조성됐고 공청이 민청으로 전환되는 과정에는 45년 10월의 서북5도 당책임자 및 열성자대회때 전개됐던 김일성과 국내파의 격렬한 노선투쟁과 유사한 논쟁이 동반됐다.
그점에서 공청은 분국 못지않게 북한 초기정치사의 한 단면이었다.
전 북한고위관리 서용규씨는 공청의 시작을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공청건설은 빨찌산의 입북과 더불어 당창건과 병행해 시작됐습니다. 분국창설 직전인 45년 10월초쯤(81년판 북한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의 조선전사 23권에 따르면 45년 10월6일) 공청준비위원회가 평양에서 비밀리에 발족돼 일제때 기독교청년구락부(지금의 만수대 예술극장뒤) 사무실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빨찌산파 가운데 젊은층인 김익현(후에 인민무력부 부부장)·김성국·박우섭·정만금·김원주 등이 급히 각도로 밀파됐습니다.
이들과 일제때 학생운동이나 독서회사건으로 투옥됐다가 해방이 되면서 석방된 사람들,각 지방에서 나름대로 공청운동을 하던 청년들이 곧 연결됐죠.』
○노동자등 따돌려
북한연구소 김창순 소장은 이 부분과 관련,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해방직후 신의주에 머무르고 있던 당시 얘깁니다. 노동적위대가 만들어진 뒤 어느날 갑자기 공청이 나타나더군요. 빨간 머리띠를 두른 젊은이들이 거리로 나와 구호를 외치면서 행진을 했습니다.
신의주 공청위원장은 좌익인텔리로 평가받던 남신의주 우편국장 백용하의 동생이 맡았습니다.
여기에 신의주고보 동중회 일파의 일원인 노인하(후에 판문점 연락장교),후에 모스크바대사를 지낸 이신팔,평양사범학교 교수출신으로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론에 밝은 김혁진 등이 연결됐습니다.
이들은 곧 각 면,농촌으로 파견돼 지방조직을 만들어 나가더군요.』 도지부 결성이 끝난뒤 45년 10월23일 평양에서 공청열성자회의가 열렸다.(조선전사 23권은 10월28일∼29일)
약 60여명의 청년지도자들이 참석한 이 회의에서 북조선공산주의청년동맹의 창립이 선포됐다.
위원장에 김익현,부위원장에 박우섭·송희철(후에 정무원 무역부부부장),김원주 3인이 선출됐고 21명으로 중앙집행위원회를 구성했다.
『김일성도 이 자리에 참석해서 연설을 했지요.』
서씨의 이같은 증언은 지금까지 알려져 있지 않고 연구성과도 미미한 공청건설의 과정을 처음으로 공개하는 것이다.
이로써 공청건설의 디딤돌은 마련됐다.
그러나 그것은 기초공사에 지나지 않았다. 해결해야할 많은 문제점들이 불쑥불쑥 드러났다.
내부적으로는 배타주의가 기승을 부렸다.
공청에는 일제때 징병이나 지원병으로 참전한 청년들을 배척하고 노동자들을 무식쟁이로 따돌리면서 지식청년들에게만 관심을 돌리는 편향이 심했다.
적위대에 소속된 청년가운데는 공청완장을 차고 말썽마저 피워 공청에 대한 비난이 쏟아졌다.
그러는 가운데서도 빨찌산파가 주도하는 공천건설에 탄력이 붙어가는 듯하자 좌익내부의 주도권 싸움이 고개를 들었고 우파와의 힘겨루기인 가두시위와 폭력대결도 격렬해져 갔다.
서씨의 증언.
『북에서 공청운동이 시작되자 서울의 조선공산당이 김모라는 사람을 파견했습니다. 지도겸 감독을 하겠다는 것이었죠. 분국등장 이전이어서 조선공산당이 그렇게 나서는 것은 당연했다고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평양공청은 「이남에서 공청을 따로 만들어라. 우리는 우리대로 공청조직을 따로 만들겠다」며 상대를 안했습니다.』
박헌영­김일성회동 초기 자주 나타났던 빨찌산파의 조선공산당 권위부정의 한 측면이었다.
우익청년단체의 등장도 큰 부담이었다.
45년 11월 조선민주당의 출범을 전후로 민족계열 청년단체가 대거 출현했다. 해방청년동맹,애국청년동맹,건국청년동맹 등 유학생,학병출신 청년들이 주도하는 이들 민족계열 단체들은 반공을 숨기지 않아 자연 공청과 이들단체 사이에 대립의 분위기가 점점 더 짙어갔다.
서씨의 증언.
『공청이 청년조직이다보니 활동과정에서 우익조직과의 싸움이 빈발했습니다. 신의주,정주,원산,함흥,흥남,청진,해주같은 곳에서 이런 일이 많이 일어났습니다.
○김,방향전환 모색
신의주,원산에서는 서로의 사무실을 파괴하는 사태까지 있었습니다.
신의주사건 직후 공청중앙에서 평북도조직 점검을 위해 사람을 파견했습니다만 분위기가 너무 살벌해 도망치다시피 평양으로 돌아온 일까지 있었습니다.
평북도 애국청년동맹(위원장 김성완)과 평북도 공청간의 알력으로 폭력충돌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조직건설에 나선지 두달정도 지난 45년 12월에 접어들면서 공청은 차차 자리를 잡아갔다.
그러나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공청의 문은 여전히 좁았고 무식쟁이라고 배척당한 문맹의 노동자·농민들,징병이나 지원병을 갔다온 청년들은 다른 청년조직 특히 우익조직으로 흘러들어 갔다.
그들을 환영하는 단체는 얼마든지 있었다.
대중적 기반을 확보하기 위해 시작한 공청이었음에도 두달여에 걸친 작업은 그같은 목표의 실현은 커녕 김일성파의 한계만 노출한 셈이었다. 방향전환이 필요했다.
45년 12월18일 열린 북조선분국 제3차 확대집행위원회에서는 방향전환문제가 정식으로 거론됐다.
이 위원회에서 북조선분국 책임비서로 선출된 김일성은 공청의 과감한 성격전환을 요구했다.
그같은 요구는 김일성과 여러면에서 입장을 달리하고 있던 국내파와 조선공산당의 반발을 일으켰다.
□특별취재반
북한부
김국후 차장
안희창 기자
유영구 기자
안성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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