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바뀐 운명' 그녀는 어디에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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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덟 살 나이에 차정희란 이름으로 미국에 입양된 소녀.
하지만 양부모가 보내준 신발을 신고 공항에 내린 건 강옥진이었습니다.
.맞지 않는 신발.을 신고 살아온 쉰 살 다큐 감독 디안 볼셰이.
세 이름의 그녀가 .신발.의 원래 주인을 찾아왔습니다.

1966년 성탄절 무렵 '강옥진'이라는 여자 아이가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하지만 여권에 적힌 이름은 '차정희'. 고아원 사람이 "네가 진짜 누구인지 말해서는 안 된다"고 당부한 상태였다. 1남1녀를 둔 볼셰이 부부가 샌프란시스코 공항에서 그녀를 반갑게 맞았다. 이미 2년에 걸쳐 '차정희'에게 매달 돈과 옷가지.장난감을 보내며 후원해 온 터였다. 미국식 나이로 8세였던 아이는 디안 볼셰이(50.다큐멘터리 감독)가 됐다. 강옥진으로 태어나, 차정희로 입양되고, 디안 볼셰이로 자란 3중의 정체성 고통은 이렇게 시작됐다.

"일상생활이 적힌 편지를 주고받으며 부모님은 '차정희'를 사랑하게 됐고, 막내딸로 입양을 결심했어요. 입양 주선 기관에 따로 부탁을 하고, 갖은 서류를 마련하고, 비용을 지급했죠. 그런데 직전에 '차정희'를 가족이 와서 데려간 모양이에요. 고아원에서 대신 저를 보내기로 한 거죠. 닮았다고 여겼나 봐요."

백인 중산층 동네에 한국어를 아는 사람은 없었다. 차츰 영어를 말하게 된 소녀는 자신이 차정희가 아니라고 고백했다. 부모는 믿지 않았다. 딸에게 입양 서류를 보여줬다. 소녀는 그렇게 한국을 잊어버렸다. 본격적인 고민이 다시 시작된 것은 대학 시절. 본래 가족이 있었다는 어렴풋한 기억이 고통스레 되살아났다. 서류에 적힌 한국의 고아원에 편지를 보냈다. 친어머니와 다른 가족들을 찾아 만났다.

"제가 차정희가 아니라는 사실은 양부모님한테도 퍽 힘든 일이었어요. 좋은 분들이고, 훌륭한 부모였지만 이 문제만큼은 좀처럼 함께 이야기하기 힘들었죠. 한국에서 보낸 가족사진이 저와 너무 닮은 것을 보고서야 수긍을 하셨지요."

이후 양부모도 한국을 방문해 양쪽 가족이 함께 만났다. 그 과정을 볼셰이는 2000년 첫 번째 다큐 'First Person Plural'에 담았다. 우리말로 옮기면 '1인칭 복수(複數)'. 이름이 세 개인 채 그녀가 겪어 온 고민을 함축한다. 양부모가 꼼꼼하게 찍어놓은 홈비디오와 한국 상황을 담은 자료화면을 곁들여 감독의 내밀한 고통을 섬세하고 뭉클하게 그려냈다. 독립영화축제로 이름난 선댄스영화제에 공식 초청됐다. 샌프란시스코 영화제에서 상도 타고, 공영방송 PBS가 미국 전역에 방송했다.

그렇게 미국인 볼셰이와 한국인 강옥진은 하나로 만났다. 아직 만나지 못한 '차정희'는 지금도 그녀의 일부다. 운전면허.진료기록 등 각종 문서에서 그녀는 차정희의 생년월일로 살아간다.

"내가 그 아이의 삶을 대신 산 게 아닐까. 옷도, 편지도 모두 그 아이 것인데. 나는 이 가족의 온당한 식구가 아니라는 생각에 시달렸어요. 혼란스러웠지만 어린 저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지요. 이제는 그 사람 '차정희'를 찾고 싶고, 직접 만나고 싶어요. 어떻게 살아왔을지."

두 번째 다큐 'Precious Objects of Desire'를 감독이 찍기 시작한 이유다. 제목이 뜻하는 그 '갈망의 고귀한 대상'이 누구인지, 무엇인지 짐작할 만하다. 다큐에는 '차정희 찾기'의 모든 과정과 감독처럼 미국과 유럽 각지에서 성장한 입양아들의 이야기, 그리고 국내 관련 단체 등의 인터뷰를 담을 계획이다.

"한국 아이들이 20만 명 가까이 해외로 입양됐어요. 그 부모형제, 친척을 합하면… 참 많죠. 입양아들의 삶이 어떤 것인지 더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해외 입양은 해결책이 아닙니다. 가족이 헤어지지 않도록 지원하는 게 최선이죠. 아니면 국내 입양이고요."

지난해 차례로 세상을 뜬 미국인 부모는 어린 차정희의 발을 본뜬 그림을 간직해 왔다. 그 치수에 맞춰 한국에 신발을 보냈던 것이다. 소녀가 미국에 신고 간, 하지만 발에 맞지 않는 신발이었다. 그녀는 지금 이 신발의 본래 주인을 찾는다. 1956년 11월 5일생이고, 전주의 고아원에 2년 남짓 머물렀고, 지금은 오십줄에 들어섰을 여성 차정희씨다. 감독은 일단 12일까지 한국에 머무른다. 연락처 02-751-5583, 010-6226-5922.

이후남 기자 <hoonam@joongang.co.kr>
사진=조문규 기자 <chom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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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디안 볼셰이=영화감독.프로듀서. 대학 졸업 후 다큐멘터리의 투자.배급 등을 지원하는 비영리기관 '아시아 아메리칸 미디어 센터'에서 일했다. 여러 편의 다큐멘터리에 프로듀서로 참여했다. 직접 감독을 맡은 첫 번째 영화는 국내에 소개되지 않았다. 촬영 중인 속편은 한국에 소개할 생각이다. 결혼해 현재 아들 하나를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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