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ek&쉼] 비밀화원 萬花方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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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전 봄바람에 흥미로운 소문이 실려왔습니다. '충무·거제·고성 통틀어 가장 높은 벽방산(650m). 그 중턱에 '비밀의 화원'이 있다. 야생 녹차밭에 산벚꽃이 흐드러지게 핀다더라. 사람을 들이지 않고 10여 년 주인 혼자 가꾼 곳인데, 드디어 문을 열었다.' 산벚꽃도 솔깃하고 야생 녹차밭도 놓치기 아까운데 둘 다랍니다. 거기다 이름이 또 더 없이 그윽했습니다. 만화방초(萬花方草, 갖가지 꽃과 향기로운 풀). 벚꽃 터지길 기다려 지난주 고속도로를 달렸습니다.

<고성> 글·사진=김한별 기자 idstar@joongang.co.kr

"서울서 오셨다고요? 이 양반 방금 야생화밭에 갔는데…."

툇마루에 선 안주인이 넉넉한 미소로 손님을 맞는다. 주인 내외의 살림집이자 차 덖는 작업장인 황톳집. 황토에 짚을 섞어 벽을 세우고 지붕엔 갈대를 얹었다. 뒷담 둔덕엔 개나리.진달래가 늘어져 있고, 처마 끝에선 딸랑딸랑 풍경이 운다. 잠깐 보는 것도 이리 뿌듯한데 내처 사는 이는 어떨까. 안주인 사람 좋은 미소엔 다 이유가 있었다.

황톳집 뒷길을 오르자 '소문의 실체'가 눈앞에 펼쳐졌다. 산비탈에 층층이 쌓인 녹차밭 계단. 그 주변을 만개한 벚꽃이 하얀 띠처럼 두르고 있다. 아예 밭 가운데 자리를 잡은 나무도 있다. 짙푸른 녹차밭에 피어난 연분홍 꽃구름이라니. 본 적 없는 진풍경이다. 더구나 흔한 왕벚이 아니라 산벚이다. 왕벚은 꽃 3~5개가 한데 붙어 피지만 산벚은 가지 여기저기 흩어져 핀다. 화사하기로 따지면 왕벚꽃이 윗길이지만, 자연미는 산벚꽃을 못 따라간다. 향도 산벚꽃이 더 짙고 깊다. 벚꽃향에 취해 걷다 보니 어느새 녹차밭이 끝나고 야생화 숲길. 복수초.얼레지가 지천이다. 그곳에서 만화방초 주인 정종조 사장을 만났다.

"남 보여주려고 만든 곳이 아닙니다. 차 팔아먹고 살라고 만든 밭도 아니고." 고성이 고향인 정 사장은 부산에서 무역업을 크게 했다고 했다. 그러다 IMF가 터졌다. 거래하던 대기업이 무너지면서 덩달아 위기가 닥쳤다.

"빚 독촉에 도무지 살 수가 없었습니다. 스트레스 탓에 잠을 못 잘 정도였어요. 이러다 죽겠다 싶어 고향에 내려와 무작정 땅을 팠습니다. 몸을 혹사시키면 혹 잠이라도 편히 잘까 싶어서…."

부모에게 물려받은 땅은 원래 밤을 따고 젖소를 키우던 곳이었다고 한다. 그곳에 정 사장은 차나무를 심었다. 주위에선 "미친 짓"이라고 말렸다. 산 속에 녹차밭이 웬 말이냐고, 떼돈을 벌어도 시원찮을 판에 왜 돈 버릴 일만 하느냐고. 하지만 개의치 않았다. 묵묵히 돌을 져 나르고 아카시아를 뽑아냈다.

'산중수도' 덕을 본 걸까. 사업은 다시 풀려나가기 시작했다. 정 사장은 농장을 제대로 가꾸라는 하늘의 뜻으로 받아들였다. 그 후 10년, 그는 삶을 둘로 쪼개 살았다. 일주일의 반은 부산에서, 나머지 반은 농장에서. 돈을 버는 족족 농장에다 털어넣었다. 어느 마을에서 고목을 벤다는 소식만 들리면 달려가 사들였다. 황톳집 앞마당 동백나무는 충청도에서, 농장 입구 단풍 나무는 전라도에서 그렇게 '모셔 온' 것이다. 산과 들을 쏘다니며 야생화도 옮겨 심었다. 멋진 이름도 얻었다. 고성 출신 문필가 김열규 서강대 명예교수가 만화방초(萬花芳草)란 이름을 지어줬다.

멋모르고 시작한 차 농사도 곧 이력이 붙었다. 만화방초의 차밭은 약 2만 평. 제대로 거두면 녹차 5000통은 낼 수 있는 규모지만 매년 300~400통만 만들었다. 만들어 팔 욕심이 없으니 비싼 인건비 주며 더 거둘 이유가 없다. 지인들과 나눠 먹는 것으로 만족했다. 하지만 품질만큼은 최고라고 자부한다. 비료나 농약을 안 쓰는 100% 자연산이기 때문이다. 3년에 한번 거름만 준다. '야생녹차밭' 소문은 그래서 났다.

정사장은 녹차밭에 사람 손을 대는 대신 산벚나무를 심었다. 나무가 바람을 막아주고 꽃이 차 수확 시기를 알려준다. 만화방초의 첫 차 따는 시기는 매년 벚꽃 지고 10일 후. 밭고랑 사이에도 꽃을 심었다. 벚꽃이 지면 영산홍, 그 다음에는 금낭화, 가을에는 상사화가 피어난다. 꽃이 한창일 때는 푸른 차나무 한 고랑, 붉은 꽃 한 고랑이 교대로 산비탈을 물들인다.

애지중지하는 농장을 뒤늦게 공개한 이유는 뭘까.

"어찌 소문이 났는지 유치원에서 견학을 오겠다는데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지식은 도시에서도 배울 수 있지만 그걸 담는 그릇은 자연에서 배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

아직 100% 개방은 아니다. 6월까지는 일종의 시범공개 기간이다. 사람 손을 타 농장이 망가지겠다 싶으면 언제든 다시 문을 닫을 생각이란다. 관광농원 허가를 안 낸 것도 그 때문이다.

녹차나 한잔 하자며 벚나무 길을 내려가는 정 사장. 그러고 보니 단단한 뒷모습이 산벚나무를 닮았다. IMF의 절망을 딛고 만화방초 가득한 농장을 피워낸 한 그루 산벚나무. 문득 시 한 구절이 떠올랐다.

"…나무는 희망에 대하여 과장하지 않았지만/ 절망을 만나서도 작아지지 않았다/ 묵묵히 그것들의 한복판을 지나왔을 뿐이다…." (도종환 시 '산벚나무' 중에서)

여행정보

■만화방초=농장 사정에 따라 문을 안 여는 경우가 있다. 방문 하루 전 전화로 개장 여부를 확인해 둘 것. 051-610-1041. 쓰레기 처리비 명목으로 관리비를 받는다. 성인 2000원, 어린이 1000원. 29일엔 고성 차인회에서 헌다제(獻茶祭)를 연다. 중요 무형문화재 제7호 고성 오광대 탈춤 공연도 볼 수 있다.

■교통=대전~통영 고속도로 동고성 IC에서 10분 거리. IC를 빠져 나와 거류 방향으로 우회전한 후 고성읍 못 미쳐 다시 우회전. 이때부터는 안내 표지판을 따라가면 된다. 홈페이지(www.bangcho.com)에서 지도를 출력해 갈 것.

■주변 볼거리=만화방초에서 한 시간이면 벽방산 정산에 오를 수 있다. 한려수도가 한눈에 들어온다. 농장 건너편 거류산 등산로 초입엔 엄홍길 전시관이 있다. 고성 출신 엄홍길씨를 기념하는 곳으로 텐트.무전기 등 엄씨가 기증한 장비 50여 점이 전시된다. 현재 히말라야 원정 중인 엄홍길씨가 귀국하는 6월 문을 열 예정이다.

■먹거리=산과 들, 바다를 두루 갖춘 고성은 먹거리가 풍성한 고장. 소위 '고성 한정식'을 먹어보면 경상도 음식 박하다는 편견을 버리게 된다. 만화방초에서 5분 거리인 고성읍내 해물한정식에선 단돈 6000원에 20여 가지 반찬을 내온다. 막회 두 가지에 꼬막 등 조개가 두 종류, 고성 말로 털치라고 부르는 바닷가재와 문어 데친 것, 도다리 조림, 요즘 제철인 멸치회까지 나온다. 특히 입이 두툼하고 맛이 단 고성 시금치와 함께 무친 멸치회는 이 집만의 별미. 한국전력 고성지점 건너편 건물 2층.055-674-78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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