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을 열며] '더불어 숲 학교'의 향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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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얼마 전 주말 강원도 개인산(開仁山) 기슭 내린천변에 자리한 '더불어 숲 학교'를 찾았다. 지난 10월 18일 문을 연 이 학교는 사람들의 입을 통해 조금씩 이름을 알리고 있다고 했다. 그동안 격주로 열리는 강의에 유재원(한국외국어대 교수.그리스신화학).신경림(시인).승효상(건축가)씨 등이 강사로 나섰고 그 날은 신영복(성공회대 교수) 교장 선생님의 개교 후 첫 직강(直講)이 마련됐다.

홍천을 지나 상남에서 현리로 접어드는 내린천 초입, 학교 가는 길의 산세는 암벽과 낙엽수, 그리고 소나무가 어우러진, 말 그대로 실경 산수화를 연출하고 있었다. 미산계곡의 개인산방(더불어 숲 학교의 강의실)에 들어서니 하루 전날 대전에서 올라왔다는 두 사람이 주변 비조불통(非鳥不通:'새가 아니면 넘지 못한다'는 뜻) 계곡을 한적하게 거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대구와 마산에서 왔다는 사람이 모여들고 곧이어 서울서 출발한 '스쿨 버스'(전세 버스)가 도착하고 나니 '학생'들은 40명으로 불었다.

이들은 왜 근사한 유원지나 명승고적을 마다하고 이 외진 곳을 찾아 1박2일의 문화 공동체 일원이길 바라는 것일까. 참가자 면면을 소개하는 것으로 답은 주어질 듯하다. 헌책방을 경영하는 사람, 의사를 하다 지쳐 6개월째 쉬는 사람, 갓난 아이를 들쳐업고 온 주부, 그리고 교사.수녀.목수…. 삶에 지친 도회인들이 자연과 문화의 향기를 맡고 싶어서일 터다.

학생들이 큰 방에 둘러앉고 申교장선생님의 '나의 고전독법' 강의는 시작됐다. 그는 "큰 대학의 교수라는 직함보다 작은 산골학교 교장에 정감이 간다"고 운을 뗀 다음 "내가 무기징역 형을 받고 감옥에 처음 갔을 때는 책을 3권 이상 갖지 못했다. 그래서 오래 볼 수 있는 책으로 동양의 논어.주역.맹자 등 고전을 택했는데 유럽식 근대성을 비판적으로 수용하는 방식으로 읽어내렸다"고 말했다.

가령 주역에 나오는 '碩果不食(석과불식)'-. '씨 과실은 먹히지 않는다'는 의미인데 교장 선생님은 "늦가을에 가지 끝에 까치밥으로 남아 있는 감을 연상케 한다"는 문학적 의미를 보탰다. 그런가 하면 공자가 말한 '군자불기(君子不器)'-. '군자는(일정한 용도로 쓰이는) 그릇과 같아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이 대목에서 교장 선생님은 "지도자는 특정한 기능(그릇)을 가진 전문인이 아니라 인간미를 지녀야 하는 것으로 풀이하고 싶다"고 덧붙였다.

강의는 예정 시간을 무려 1시간40분을 넘긴 오후 11시10분에 끝났다. 이날 고전 공부는 역사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역사에서 배우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을 것 같았다. 뒤풀이 자리에서 申교장선생님은 학생들의 부추김을 이기지 못해 노래를 불렀다. 감옥에서 좋은 일이 있을 때 불렀다는 곡-. "냇물아 흘러흘러 어디로 가니/강물 따라 가고 싶어 강으로 간다/강물아 흘러흘러 어디로 가니/넓은 세상 보고 싶어 바다로 간다."

이후 일부는 다소 불편한 방에 몸을 뉘었지만 상당수 학생은 모닥불을 지피고 둘러섰다. 막걸리 잔이 거푸 돌아가는 사이로 소곤소곤 얘기는 이어졌다. 오전 5시10분 내린천의 물소리가 더 거세지는 것을 느끼며 자리를 파했다. 도회지에서 온 학생 누구 하나 힘들어하기는커녕 1박2일을 아쉬워하는 듯했다.

하굣길, 더불어숲학교 현판 글이 눈에 들어왔다. "나무가 나무에게 말했습니다. 우리 더불어 숲이 되어 지키자." 비록 작고 이름 없지만, 이렇게 자생하는 문화학교가 이 땅의 정신적 풍요로움을 기약하는 터전이 될 것만 같았다.

허의도 문화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