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박한 세상인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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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저녁쌀을 씻어 안치려는데 손이 벌벌 떨려 하마트면 솥을 놓칠 뻔했다.
오후에 집 근처 은행을 가는데, 은행 옆길에 시골에서 저장했던 것을 직접 가져와 파는 것이라며 란 포기에 1천원 씩 받고 시골농부가 배추를 말고 있었다. 작은 배추지만 싸고 맛있어 보였다.
나는 은행 일을 얼른 보고 마침 앞집 애기 엄마가「설날용 햇김치를 담글 때가 됐는데…」하며 지나던 말도 생각나 앞집 것과 우리 것을 합해 8포기나 샀다.
운반은 내가 평소 이용하던 연금매점의 고객서비스로 운행하는 버스를 타면 되겠지 하는 계산을 하고….
배추를 들고 버스에 오르니 손님은 별로 없었다. 나는 떠나기 전 얼른 보훈 연금매점에 뛰어가 다른 것도 사올까 하다 배추무게에 눌려 다음에 사야지 하고 그냥 눌러 앉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운전대에 앉은 기사는 나를 흘낏 쳐다보더니 일어서서 내 곁에 다가와 내 물건이 배추뿐인 것을 알고 이게 동네 버스인줄 아느냐며 내리라고 했다.
순간 나는 부끄럽고 무안하여 얼굴이 화끈거려 답할 말을 잃었다.
나는 무거운 배추를 들고 걸어오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됐다.
처음엔 기사를 원망하고 증오도 했지만 나중엔 공중전화를 오래 건다는 이유로 뒷사람에게 죽임도 당하는 이 험한 세상에 그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자위도 해보았다.
아울러 나도 혹시 무심코 생각 없이 던진 한마디로 상대방을 가슴 아프게 한 적은 없었을까. 어쩌면 생각 없이 스친 그런 말들로 벌을 받는다는 자학도 했다.
단 그 버스기사의 나이가 사오십 대는 됐음 직한데 그 나이 되도록 이웃을 생각하는 인정이 없었다는게 안따깝게 느껴지기도 했다.
앞 집에 배추를 전해주고 배추 값과 함께 덤으로 고맙다는 말까지 들었다. 너무 무거워 팔이 아픈데 아픈 것은 둘째치고 까닭 없이 눈물이 자꾸 흘렀다. 과연 우리는 이렇게 각박하게만 살아야 하는 걸까. <김현숙><서울영등포구 문래6가 현대아파트201동80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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