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비전도 원칙도 없는 한나라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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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훌륭한 정치인은 비전이 있어야 한다. 일반 시민보다 조금은 더 멀리 내다보고 정책을 설계하고 이끌어 가야 한다. 그래야 우리의 미래를 맡길 수 있다. 눈앞의 이익에 매달려 전전긍긍한다면 길거리에서 물건을 흥정하는 일반 서민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그런 사람이 지도자인 나라가 어떻게 거센 국제 경쟁의 파도를 헤쳐나갈 수 있겠는가.

최근 한나라당의 행태를 보면 이런 우리 기대와 한참 어긋나 있다. 정말 집권 의지가 있는 것인지 의심스럽다. 그들은 현 노무현 정부의 정책을 대중영합주의(포퓰리즘)라고 비판해 왔다. 하지만 자기들 스스로 그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나 국민연금 개혁과 같은 국가적 과제에 부닥칠 때마다 미래를 보기는커녕 구차하게 눈앞의 표만 구걸하고 있어 정말 실망스럽다.

당장 한.미 FTA에 대응하는 자세만 봐도 그렇다. 노무현 대통령이 이를 밀어붙이는 동안 한나라당이 한 게 뭔가. 분명한 입장 한번 밝힌 적이 없다. 그저 어정쩡한 양다리 걸치기만 해왔다. 그래서 성과가 있으면 슬쩍 한 다리를 올려놓고, 여론이 나빠지면 몽땅 떠넘기겠다는 얄팍한 계산이 아니었던가. 심지어 협상이 타결된 이후에도 강재섭 대표는 "타결과 비준은 기본적으로 별개 사안"이라고 말했다. 비준을 하겠다는 건지 말겠다는 건지, 정부가 정치적 부담을 감수해 가며 성과를 끌어내 놓은 이후에도 눈치만 살폈다. 이런 나약한 자세로 어떻게 국정을 운영해 나가겠다는 건가.

어디 그뿐인가. 현 정부의 부동산 정책 실패가 반시장주의 때문이라고 비판해 놓고는 주택법 개정안을 통과시켜 줬다. 반시장적인 분양원가 공개와 분양가 상한제를 담은 이 법안을 통과시켜 주었으니 모순된 행동을 한 것이다. 그럴 거라면 차라리 한나라당도 현 정부의 부동산 정책에 찬성한다고 공개적으로 발표하는 게 정직하다. 스스로 불합리하다고 주장하면서도 여론에 영합해 법안을 만들어 놓고, 그 책임은 모면해 보겠다는 것은 비겁하다.

가장 개탄스러운 것은 국민연금법이다. 지금도 매일 800억원씩 잠재 부채가 쌓이고 있다. 2047년이 되면 연금 기금이 완전히 바닥나 96조원의 적자가 난다. 어렵게 상임위까지 통과한 법안을 부결시켜 버렸으니 또다시 개정 절차를 밟으려면 얼마가 걸릴지 모른다. 그 부담은 몽땅 애꿎은 우리 자식들에게 넘어갈 수밖에 없다. 자식들이 낸 세금으로 메워넣어야 한다. 그런데도 세금으로 지급하는 노령연금법까지 통과시켰다. 내년에 당장 2조4000억원, 2030년에는 19조원이나 들어간다. 이렇게 흥청망청 인심을 써서 표를 얻겠다는 것이 바로 전형적인 포퓰리즘이다.

파멸로 가는 것을 알면서도 눈을 감는 것은 지도자가 아니다. 책임 있는 정당이 아니다. 이러고서야 한.미 FTA를 놓고 자신의 지지층과 정면대결을 벌인 노 대통령을 무슨 낯으로 비판할 것인가. 이런 정당을 어떻게 믿겠는가. 또 집권한들 포퓰리즘이라고 비난해온 현 정권과 무엇이 달라질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