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체 등반일기1] 히말라야 등반의 적, 고소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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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다큐멘타리 '산'의 지현호PD도 고소증을 비켜가지 못했다.지PD도 3일정도 본대와 떨어져 고소적응을 마친뒤 베이스 캠프에 합류했다.지PD는 베이스캠프에 합류한 뒤에도 가벼운 두통을 호소했다. 로체 베이스캠프=김춘식 기자

네팔 카트만두에서 로체로 가기 3일전인 3월19일 원정대 부단장인 안양성모병원 문영식 박사가 숙소 안나푸르나호텔 자기방에서 대원들의 혈중산소치와 맥박.혈압.심폐기능 등을 체크했다. 지난 몇년간 이번 등정을 준비해온 원정대원들의 혈중 산소치는 보통 90대 후반, 맥박수는 1분간 60여회였다 (카트만두의 고도는 1400m). 엄홍길 원정대장의 경우 평소 맥박수는 일반인보다 훨씬 낮은 50대 중반 수준이라고 해 기자를 놀라게 했다. 스페인 바르셀로나 몬주익 언덕을 성난 탱크처럼 밀고 올라가던 현역시절 마라토너 황영조의 맥박수가 50대 초반으로 놀라운 심폐기능의 산물이었다는 것을 생의학적 측면에서 구체적 수치로 증명했다고 한다. 아직 현역으로 뛰고 있는 마라토너 이봉주의 맥박수 역시 50대 초반으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선수답게 예사롭지 않은 심폐기능을 보유하고 있다.

"약간 높군요. 고소증에 시달릴 가능성이 농후해요."

젊은 원정대원들의 맥박수와 같을거라는 예상은 언감생심 꿈도 꾸지 않았지만 그래도 70을 훌쩍 넘는 맥박수는 기자의 신경을 곤두서게 했다.

"맥박이 그렇게 중요합니까?"

"그럼요. 누구는 50번의 심장운동으로 신체 각기관에 산소를 보내는데 누구는 70번을 움직여야 한다면 어느쪽이 더 피곤해질까요? 고소증세에 시달릴 가능성이 그만큼 많은 겁니다."

"베이스캠프까지만 갈건데요, 뭐."

"아닐걸요. 그게 백두산의 두 배쯤 됩니다. 쉽지 않죠. 애 좀 먹을 겁니다."

맥이 탁 풀렸다. 회사에 남아 하던 일이나 할 걸 괜한 짓을 벌였다는 낭패감이 미처 산에 오르기도 전부터 몰려들었다.

강행군속에 26일 고도 3800M 정도의 '팡보체'에 도착한 박현숙대원이 고소증세로 식사조차 하지 못하자 팀닥터인 안양성모병원의 문영식박사가 박대원을 치료하고 있다.박대원은 결국 고도가 낮은 곳으로 철수했다가 베이스캠프에 도착한 2일후에 본대와 합류했다.박대원은 현재 정상 컨디션이다. 로체 베이스캠프=김춘식 기자

사실 고소증세만 없다면 해발 8000m 급 산악의 등정도 그리 어려워 보이지는 않는다. 5000m 이상 고지에 위치한 베이스캠프는 해수면에 비해 산소량이 절반 수준에 불과하다. 8000m 이상을 올라가면 산소량은 해수면에 비해 3분의1 정도로 뚝 떨어진다.

7500m 이상의 고산지대를 '데쓰 존(death zone)'이라 부르는데 이는 생명을 위협할만한 급격한 경사나 예고 없이 발생하는 눈사태 때문이 아니라 희박한 산소로부터 발생하는 고산증세가 이 지점부터 극대화되기 때문이다. 고산증은 육체적으로는 물론이고 정신적으로도 인체에 심각한 타격을 가한다.

고소증세는 과연 어떤 것일까.

주말이면 즐겨 올랐던 집 주변 청계산과 관악산은 해발고도가 600여m에 불과하다. 해발고도 600여m는 산소부족을 운운할만한 고도가 아니다. 오히려 600m나 700m의 고도는 인간이 호흡하기 좋아 휴양소 등을 건축할 때 추천하는 고도이기도 하다.

경비행기를 타고 해발 2100m에 위치한 산간마을 '루크라'에 도착했을 때 기자는 아무런 증세를 느끼지 못했다. 도착 당일 저녁 무렵 약 2800m 고도의 '몬주'에 도착했을 때도 별다른 증세가 없었다. 이른 아침 해발 1300m의 카트만두를 출발해 저녁 무렵 2800m 산간 오지에서 저녁 식탁을 맞이했으니 한나절 만에 무려 1500m의 고도를 높인 셈이지만 그날 하루 이동거리 13km를 감안한 약간의 피로감만 제외하면 그때까지만 해도 그럭저럭 견딜만 했다. 다만 머리가 띵한 증세가 약간 있어 활동하는데 다소 불편하긴 했지만 이게 며칠동안 줄기차게 산행을 방해할 줄은 그땐 정말 몰랐었다.

다음날 오후 도착한 또다른 산간마을 '남체'의 고도는 3400m였다. 정말 천천히 올라왔는데도 어지러운 증상이 상당했다. 전생의 원수가 무쇠 솥뚜껑만한 손으로 있는 힘을 다해 머리를 쥐어짜는 듯 불쾌했다. 한 걸음이 마치 열 걸음 같았고, 한 발 내디딜 때마다 숨을 헐떡거려 십여 걸음을 걷고나면 여지없이 그 자리에 서서 거친 숨을 골라야 했다. 정말 미칠 지경이었다. 한국의 산은 아무리 빨리 올라도 이렇지는 않았었다. 할 수 없이 대열을 뒤따라 가는 것은 아예 포기하기로 했다. 걷다가 쉬고, 쉬다가 걷고.

모두가 도착해 이미 정리를 끝낸 남체 로지에 뒤늦게 도착했다. 악전고투 끝에 도착한 곳이건만 보람은 없었다. 내가 이 정도밖에 되지 않나 하는 자괴감만 있었을 뿐.

심장질환 예방용으로 평소 매일 한 알씩 먹던 100mg 아스피린 2알을 털어넣었다(일반 아스피린은 500mg이다). 효과 별무.

머리가 아파 혼자 낑낑대고 있는 모습이 안쓰러웠는지 문영식 박사가 타이레놀 2알을 건네줬다. 그런데 예상외로 이게 직효였다.

고소증세에 관한 논문으로 고려대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한 원정대의 홍성택 등반대장이 지나가다 한마디 거들었다.

"증세가 심각하지 않더라도 타이레놀 한 두 개 미리 먹어두는 것이 좋아요. 뇌 혈관을 확장시켜 혈액 순환을 쉽게 해 주거든요."

이후 되도록 약의 힘을 빌리지 않겠다는 애초의 의지는, 약 없이 견뎌야 하는 고통이 너무 커 포기하기로 했다. 이뇨제와 타이레놀 등이 처방됐지만 결국 고소증세를 극복하지 못한 일부 대원은 고도가 낮은 곳으로 발길을 되돌렸다. 숨쉴 때마다 폐에서 그르렁그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리거나 머리에 물이 차 회복 불능의 혼수 상태에 빠지기 전에 스스로 주변 동료에게 증세를 설명하고 적절한 조치를 받는 것은 고산 등정의 기본이다.

베이스캠프에 도착한 지금 아직도 4명의 대원이 베이스캠프 아래 동네로 내려가 고소적응 프로그램을 밟고 있다.

만약 고도에 상관없이 대기상태가 동일한 산소량을 유지한다고 하면 우수한 등산장비의 지원을 바탕으로 희말라야의 고봉들은 어중이떠중이 산악인들의 놀이터로 전락해 버렸을 게 뻔하다. 고산에서의 희박한 산소는, 현지에서는 일종의 신으로 추앙받는 산이 자신의 위엄을 지켜내기 위한 차단장치인 셈이다. 산이 원하지 않으면 어느 인간이든 자신의 머리를 밟고 돌아다니는 것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고소의 희박한 산소로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산은 선별적으로 인간의 접근을 허락함으로써 자신의 위엄을 지킨다. 위엄이 없는 산을 오른들 무슨 보람이 있겠는가.

로체 베이스캠프=김춘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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