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호성과 밀약의 정치/전육(중앙칼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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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노태우 대통령의 정치스타일에서 두드러진 특징의 하나로 「의도된 모호성」을 빼놓을 수 없을 것 같다. 단순히 성격때문인지,아니면 고도의 전술·전략에서 비롯된 정치기술인지는 알 수 없지만 여하튼 재임중 주요 고비마다 모호성의 정치술을 보여왔다.
전두환 전대통령이 백담사로 가게된 5공청산과정은 물론이고 정호용 의원의 의원직 사퇴때 그는 한동안 그들을 방어하는 자세였으나 끝내는 대세에 밀려 어쩔 수 없이 물러서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또 선거공약이었던 중간평가 취소나 지방자치단체장 선거연기등 주요정책변경에 있어서도 관측·부인·해명의 과정을 거쳐 의도된 목적을 이뤄왔다.
○큰 고비마다 나타나
이같은 과정을 통해 그 모호성은 다분히 전략적이 아닌가 하는 인상을 주기도 했으나 때로는 상황에 떠밀려다닌것이 아니냐는 의구심을 불러일으킬 때도 있었다.
이로 말미암아 노대통령은 대통령을 항수로 놓고 정치상황을 거기에 끼워 맞춰 끌고가려했던 전임대통령들을 권위주의로 부각시킨 만큼 자신은 상대적으로 민주적이란 이미지를 심을 수 있었다. 그러나 민주적이라기보다 정치적 상황론자가 아니냐는 시각도 뒤따랐다.
아무튼 그는 방침을 세우면 반드시 이뤄지도록 해야하며 중지하거나 경솔히 변경해서는 안된다는 동양적 리더십의 공의와는 다른 모습을 자주 보여주었다.
목표와 과정을 유동적인 것으로 두고 「의도된 모호성」을 보이다가 되어가는 상황을 보고 결론을 내린 스타일이 아닌가 하는 느낌을 준다.
그의 이같은 면모는 금년 연두회견에서도 또한번 진면목을 보인듯하다. 민자당대통령후보 선정문제에 관한 그의 언급은 모호성의 극치여서 회견직후 김영삼 대표를 반대하는 사람들의 귀에는 김대표가 당했다는 느낌을 주었고,김대표를 지지하는 사람들에겐 미심쩍기는 하지만 점지의 가능성을 던져주었다. 이도저도 아닌 국민들의 눈에는 대통령이 경선의 원칙을 지키면서 후계문제에 선택권을 행사하려는 것으로 비쳐졌다.
그러나 시간이 가면서 회견전에 벌어졌던 노·김영삼 담판내용이 알려지고 두 사람의 언동을 통한 후속조치가 가시화되면서 이번의 모호성은 종전과는 다른 측면이 있지 않느냐는 관측이 힘을 더해가고 있다. 이를테면 이번의 모호성은 노대통령 혼자서 열매를 딸 수 있는 성격이 아니며 오히려 모호성의 포장속에는 더이상 모호한채로 버려둘 수 없는 구체적 약속이 담겨 있었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김영삼 대표의 웃음
언론들이 소위 밀약이라고 표현하는 대목이다. 양측 측근들을 통해 들려오는 얘기를 듣거나 총선이 임박한 시기등으로 볼때 밀약,혹은 양자의 정국운영 공동구상 핵심은 노대통령이 김대표를 사실상 후계자로 내정,단계적 가시화작업을 약속하고 어느 시점(총선후)까지는 대통령의 권능을 우위에 두면서 국민들에겐 민주적 절차의 당당함을 강조하는 것이라는 얘기다.
단 두사람간에 이루어진 약속이 이렇게 누가 들은것처럼 알려지고 있는것은 담판 이전에 벌어진 양측간의 밀고 당기기가 워낙 치열했던데다 합의내용이 두사람간의 비밀로 가슴에 묻어놓기에는 너무 많은 이해당사자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양 진영이 벼랑에서 사활을 건 겨룸끝에 도출한것이 그 내용일 것이라고 보면 된다.
때문에 이번 만큼은 노대통령이 모호성으로 밀약의 내용을 변경시킬 여지는 거의 없어 보인다. 산전수전 겪은 김대표가 시간이 지남에도 계속 웃음을 멈추지 않고,당당히 대통령과의 역할분담론·기강론·당얼굴론을 펴도 청와대에선 이의를 달지않는다. 또 5공인사에 대한 공천영입을 김대표가 하고있고,민정·공화계에 대한 청와대의 계파차원의 보호막이 걷히고 있는 것도 눈여겨 볼만 하다. 이런 흐름에서 총선의 승패,공천지분문제는 노·김간의 제로섬 게임 대상이 아닌 것 처럼 보인다.
김대표에게 「당중심」이니 총선을 책임지고 치르라고 한 대통령의 말이 그를 사지로 몰아넣는 책략일 수도 있다는 일각의 의심 또는 기대가 여전히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제반여건을 미루어 그렇게 보기 어려운 구석이 더 많다. 그같은 가설이 성립하려면 노대통령이 언제든지 대타를 키울 힘과 시간을 갖고 있어야 한다.
○도덕성의 문제 야기
그러나 그동안 내각제를 통해 김대표 배제를 추진해오던 TK핵심세력은 대통령의 개헌포기선언으로 상황이 어려워졌다. 게다가 선거가 끝나면 대통령의 영향력은 급격히 줄어들 수 밖에 없다. 그때 가면 퇴임후의 위상이 더 절박한 문제가 될지 모른다.
확증은 없지만 아마 최근의 담판에서 노·김사이엔 후계문제 못지않게 퇴임후 위상문제·친인척공천 등이 깊숙이 논의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정치가 이처럼 밀실약속으로 처리되는 것은 노대통령이나 김대표 모두에게 도덕성의 문제를 야기할지 모른다. 노·김 밀약같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하루빨리 전모가 밝혀져야 하며 민주화의 진전을 위해선 여당부터도 정치를 제도화하는 노력이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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