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금별 왕자의 경제이야기] (29) 술은 마약과 같은 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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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정서법의 위력>

1주일간 프랑스 여행에서 돌아온 이강은 책상 위에 수북이 쌓인 센트럴 데일리를 집어들었다. 그동안 뉴스 가운데 가장 눈길을 끈 것은 미국계 사모펀드 론스타가 외환은행을 국민은행에 매각하는 것으로 잠정 결론이 난 것이었다.

은행도 여느 기업과 같이 거래의 대상이 된다는 점에서는 특별한 뉴스가 아니었으나 론스타가 짧은 기간에 엄청난 투자차익을 챙기게 됐다는 것이 논란거리가 되고 있었다. 2003년 론스타가 외환은행을 인수한 지 2년6개월 만에 매각 차익이 원금의 거의 3배인 4조2500억원에 이른다는 얘기였다. 환율 하락으로 인한 환차익까지 감안하면 총이익이 4조5000억원이라는 계산도 나왔다.

그러나 이거야말로 화장실 가기 전과 갔다온 뒤 얘기가 180도 달라진 딱 그런 경우였다. 저간의 과정은 이랬다. 2003년 초 정부는 부실이 누적돼 정상경영이 어려워진 외환은행을 팔기로 결정했다. 국내 은행 중에서 인수자를 찾아봤으나 여의치 않았다. 이미 다른 부실은행을 하나씩 인수.합병한 상태였기 때문에 추가 여력이 없었던 것이다. 대기업에 대해서는 정부가 '금산(금융자본.산업자본) 분리원칙'을 적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예 인수자격 자체가 없었다. 그래서 외국에서 인수자를 물색했다. 은행업을 하거나 해본 경험이 있는 곳이 적임이었으나 관심을 보이는 곳이 없었다. 그러다 결국 론스타로 넘어가게 됐던 것이다. 은행업과는 관계없는 단기 투자펀드인 론스타가 목표한 수익률만 올리면 다시 팔아버릴 것을 알면서도 그쪽에 넘겼다.

정부가 외환은행을 팔 땐 이렇게 론스타에 사달라고 매달렸다가 론스타가 그걸 되팔려고 하자 차익을 너무 많이 남겼으니 그동안 탈세나 불법은 없었는지 한번 따져보자고 나선 것이었다. 팔 때는 재정경제부가 서둘러 매각을 주관했고, 이번에 문제를 삼은 곳은 검찰과 감사원이었다.

-또 '국민정서법'이 기승을 부리고 있군.

외국에서도 한국엔 국민정서법이 가장 무섭다고 비꼬던 참이었다. 냉정한 법 논리가 아니라 국민의 감정에 편승한 여론몰이가 문제라는 비아냥이었다. 이강은 혀를 끌끌 차며 바람도 쐴 겸 아파트 문을 나섰다. 파란 새싹들이 한창 돋아나고 있었다. 죽은 것 같던 나뭇가지 끝에서도 다 움이 트고 있었다. 어떻게 때가 온 줄 알까. 참 오묘한 자연의 조화이었다. 아파트 뒤 정원을 걷던 이강의 눈길이 한곳으로 쏠렸다. 아파트 지붕의 물이 내려와 하수구로 흘러들기 전에 적당한 넓이의 웅덩이가 패인 곳이었다. 본래는 네모 반듯한 곳이었지만 이젠 시멘트 조각이 깨지고 그 틈새로 물풀이 그럴 듯하게 자라나 있었다. 거기서 이강은 작은 움직임을 발견했다. 놀랍게도 소라게들이었다.

너무 반가웠다. 그는 게들을 보는 순간 자신이 오만의 바닷가에 데려온 녀석들이라고 생각했다. 달라진 환경에 적응하지 못해 죽어가던 녀석들을 더 이상 볼 수 없다며, 어느 날 5층 아파트에서 던져버린 그 녀석들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뭔가 좀 이상했다. 숫자가 상당히 많았다. 그날 밤 던져버릴 때까지 살아있던 녀석은 열 마리 미만이었는데 지금은 족히 30마리는 돼 보였다.

-옳아. 그동안 새끼를 낳아 개체수를 불렸군.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이강은 또 다른 의문이 들었다.

-이 녀석들이 어떻게 그 추운 겨울을 견뎌냈지? 그리고 무엇보다 바닷물에 살던 놈들이 어떻게 민물에서 살 수 있지. 그리고 집으로 쓰고 있는 이 소라껍데기들은 다 어디서 났고?

도무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아무리 궁리해도 의문은 풀리지 않았다. 이강은 그냥 믿기로 했다. 오만에서 데려온 녀석들이 살아남아 일가를 불리고 마을을 이룬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기분이 좋아졌다. 녀석들을 괜히 한국으로 데려와 죽게 했다는 죄책감이 그동안 가슴 한구석에 있었던 것이다. 그 뒤 이강은 휴일이나 틈이 날 때면 소라게들을 '찰관'하는 걸 큰 낙으로 삼았다. 소왕에게 아파트 뒤뜰에 소라게들이 살고 있다는 얘기를 해줬더니 바로 달려왔다.

"얘네 세상에서도 재미있는 일들이 많이 벌어지고 있군."

한참을 들여다 보던 소왕이 그렇게 중얼거렸다. 이강이 의아해 하자 그는 '녀석들과 좀 더 오래 지내면 그들의 세계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이강은 어서 그렇게 돼서 소라게들의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당부했다.

<술판의 평등주의>

해외 출장을 다녀오면 의례 부서 회식이 있곤 했다. 의식은 언제나 판에 박은 대로였다. 주인공의 간단한 출장 보고가 끝나면 폭탄주가 돌았다. 술판의 평등주의는 깨어질 수 없는 원칙이었기 때문에 누구에게나 똑같은 수의 잔이 돌아갔다. 이강은 술이 진정 좋은 것이라면 평등주의는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먹이려 하기 전에 서로 많이 먹으려고 할 것이기 때문이다. 좋지 않은 것이기 때문에 혼자만 망가질 수 없다는 논리가 생겨났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최근엔 폭탄주가 많이 인간적인 모습을 띄었다. 술을 잘 못하는 사람에겐 조금 약하게 타주는 정도의 아량은 베풀어졌다.

전날 회식이 남긴 숙취를 안고 이맛살을 찌푸리고 있는데 소왕이 또 찾아왔다. 안 좋은 안색을 보면서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었다.

"과음 탓이지, 뭐."

"그런데 왜 술을 그렇게 많이 마셔?"

"글쎄 말이야."

"글쎄가 아니라 몸에도 나쁜 걸 왜 그렇게 마시는지 정말 알고 싶다고."

"글쎄… 술이 마약이라서 그러는 게 아닐까?"

"그게 무슨 소리야?"

"술은 사실 마약과 같은 거야. 술을 마시면 다른 사람이 돼. 조용하던 사람이 마구 떠들기도 하고, 폭력적이 되기도 하고, 갑자기 울기도 하고. 대부분 평소와는 영 다른 행동을 하지. 어떤 사람은 기분 전환을 위해 술을 마신다고 하지. 이상행동이든 기분전환이든 술과 마약은 거의 같은 기능과 목적을 지닌 물건이라고 할 수 있지."

"말 잘했네. 마약이 나쁘다는 걸 안다면 술도 안 마셔야 하는 것 아냐?"

"그런데 마약과 달리 술은 손만 뻗으면 어디든 있잖아. 그러니 여간 의지가 강한 사람이 아니면 끊지 못하는 것 같아. 무엇보다 한국적인 음주문화도 있고."

"한국적인 음주문화라는 건 뭐야?"

"한마디로 술을 잘 마시면 일도 잘하고 성격도 좋다는 통념이지. 이것 때문에 좀 무식하게 술을 마시는 것이 늘 문제가 되지. 이제 술 얘기는 그만 하자고."

그러면서 이강은 어린 시절 읽은 공상과학소설 얘기를 꺼내며, 우주 공간에 과연 지구보다 훨씬 앞선 문명을 가지고 있는 곳이 있는지 궁금하다고 했다.

"그 질문엔 답할 자신이 없는 걸. 나는 우리 마을에 대해서만 알고 있어. 소금별과 비교하면 당연히 지구가 눈부시지. 무엇보다 67억이란 인구가 그렇고 문화, 과학 그리고 의료기술까지 정말 대단한 것 같아. 다른 별에서도 지구를 능가할 곳은 없다는 생각이 들어. 그러나 지구든 우리 마을이든, 또 다른 별이건 다들 고유의 문화가 있다는 점에선 어디가 낫다 혹은 못하다고 말하긴 어려울 것 같아. 문화는 다른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니까."

심상복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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