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사람] 獨 '거지 성자' 노이야르 방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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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눈이 세상을 덮어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한국인의 고운 마음, 깊은 덕성과 닮은 것 같아요."

첫눈이 내린 8일 오전 서울 종로구 견지동 조계사 근처에서 독일인 페터 노이야르(62)를 만났다. 그는 무소유 사상을 실천하는 사람이다. 지난 23년간 독일 쾰른대 숲 속에서 숙식하며 '집없이, 돈없이, 여자없이' 살아온 그는 1999년 나온 '거지 성자'란 책을 통해 국내에 소개됐다.

그는 술.담배를 입에 대지 않는 것은 물론 하루 한끼 식사하는 원칙을 지키고 있다. 그나마 숲 속에서 자란 나뭇잎이나, 유통 기간이 지나 상점에서 버린 식품을 주로 먹는다. 15년 전부터는 맨발로 생활하고 있다. 이리저리 헝겁을 댄 낡은 옷을 입고 있는 그는 한 시간이 넘는 인터뷰 내내 가부좌(跏趺坐)를 틀고 형형한 눈빛을 뿜어댔다.

"학생운동이 휩쓸고 지나간 60년대 말부터 70년대 초 불교에 처음 관심을 가졌어요. 기독교 교리로는 인간이 고통받는 근본적 이유를 이해하기 힘들었죠. 이후 부처의 행적을 그대로 따르며, 그 가르침을 직접 실천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에게는 '아나가리까'란 별칭이 따라다닌다. 부처가 살았을 당시 사용됐던 팔리어로 '집없는 자'라는 뜻이다. 그는 불경을 읽고, 또 읽으며 부처의 가르침을 되새겼다. 유교.도교 등 동양 사상도 훑었다. 공식 학력은 기술전문대 졸업이지만 오랜 연마 끝에 영어.프랑스어.팔리어 등에 능통하다. 최근 한국어로 완역된 팔리어 경전 '맛지마니까야' 발간을 축하하려고 방한했다.

"이라크.중동 사태 등 각종 분쟁은 모두 자신만을 생각하는 욕심에서 비롯됐습니다. 본인이 죽거나 사기당하지 않으려면, 남을 죽이거나 속이지 말아야 한다는 기본적인 윤리조차 모르는 셈이죠."

그는 인간사를 벼룩에 비유했다. 한때 그도 옷 속에 숨어 사는 벼룩 때문에 고생했으나 어느날 신경을 끊으니 벼룩이 더 이상 그를 괴롭히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가 긁어 생긴 상처에서 피를 빨아먹었던 벼룩이 먹을 게 없어 자연스럽게 사라졌듯 인류의 평화도 상대방을 먼저 인정하고 포용해야 가능하다고 밝혔다. 그는 "미국이 참된 민주주의를 구현하려면 자기만의 정의를 다른 나라에 강요하는 오류를 범해선 안된다"고 강조했다.

박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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