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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취재일기

장관 출신들의 단식 정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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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27일 김근태 열린우리당 전 의장(左)과 천정배 의원이 한미 FTA 협상에 반대하는 단식 농성을 하고 있다.[사진=조용철·강정현 기자]

27일 오후 국회 본청 출입문 앞. 열린우리당을 탈당한 천정배(민생정치모임)의원이 이틀째 천막 단식농성을 벌이고 있었다. 같은 시간 열린우리당 김근태 전 의장은 천 의원과 100여m 떨어진 본회의장 앞에 스티로폼을 깔고 앉았다. 그 역시 이날 단식에 돌입했다. 장소는 달랐지만 둘의 주장은 같았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을 중단하고 다음 정부로 넘기라"는 것이었다. 두 사람의 가세로 한.미 FTA 협정에 반대해 단식농성을 벌이는 정치인은 민주노동당 문성현 대표와 무소속 임종인 의원 등 모두 네 명으로 늘었다.

우리 정치사에서 단식 농성은 거대 권력에 맞서는 비장한 결의를 보이는 수단이었다. 특히 과거 권위주의 정권 아래서 언로가 막히고 힘이 미약했던 야당 정치인들이 단식이란 방법을 택했다. 야당 시절 YS(김영삼 전 대통령)와 DJ(김대중 전 대통령)는 정권에 대한 저항의 수단으로, 혹은 정치적 목적을 이루기 위해 목숨을 건 단식을 하곤 했다.

하지만 이날의 단식 농성을 바라보는 시선은 엇갈렸다. 특히 범여권의 대선 예비후보이며, 노무현 정부에서 각각 보건복지부.법무부 장관을 지낸 김 전 의장과 천 의원이 단식 대열에 가세한 데 대해선 열린우리당 내에서도 비판이 나왔다. 같은 당 정장선 정책위 수석부의장은 "단식은 상황이 어렵거나 약자가 하는 수단"이라며 " FTA 협상이 진행 중인데 정치인들이 극단적 선택을 하는 게 무슨 도움이 되겠느냐"고 꼬집었다. 최재성 대변인도 "충정은 이해가 간다"면서도 "우선 협상 결과를 보고 판단해야 한다"고 했다.

한나라당의 비판은 더 거세다. 유기준 대변인은 "김 전 의장이나 천 의원 모두 열린우리당 창당 주역으로 한.미 FTA 협상이 이렇게 되고 국론 분열이 발생한 데 대해 책임을 느껴야 하는 이들인데도 책임의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단식 농성은 대선에서의 표만 생각해 벌이는 전형적인 포퓰리즘적 발상"이라고 꼬집었다.

이런 기류를 의식해서인지 김 전 의장은 단식에 들어가며 "불과 얼마 전까지 집권 여당의 의장을 지낸 사람으로서 단식 농성이 적절치 않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는 내용의 성명서를 기자들에게 돌렸다.

20일째 단식 중인 문성현 민노당 대표.

그러나 과연 다른 방법이 없었는지 의문이다. 한.미 FTA가 체결되기 위해선 양국 간 협상이 끝난 뒤 각기 국회의 비준 절차를 거쳐야 한다. 현역의원인 김 전 의장과 천 의원은 비준 과정에서 얼마든 반대 입장을 표시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얼마 전까지 국정운영의 최일선에 몸담았던 인사들이 합법적인 의사 표시 기회가 있는데도 스스로 단식이라는 극한 방법을 동원하고 나선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또 김 전 의장과 천 의원을 '정치적 약자'라 여길 국민이 얼마나 있을지도 묻고 싶다.

이가영 정치부문 기자 <ideal@joongang.co.kr>
사진=강정현 기자 <cogito@joongang.co.kr>
사진=조용철 기자 <youngcho@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