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복 만들기 32년 하석근씨|옷에 생명 불어넣는 정성으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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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본지는 새해를 맞아 산업현장에서 최고의 기능을 갈고 닦아「명장」칭호를 받은 기술인들을 소개하는 한국의 명장시리즈를 시작한다.
이들은 86년부터 90년까지 한국산업인력관리공단에서 실시한 기능경기대회에서 명장을 따낸 27명과 지난해 개정된 기능장려법에 의해 선정된 41명 등으로 장인정신이 투철하고 20년 이상 생산현장에서 일해온 우리나라 산업역군의 대표 주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새해에는 각분야의 모든 근로자들이 이들을 본받아 한국인들의 저력이 되살아나기를 기원한다. 【편집자주】
양복 한 벌을 만들 때마다 옷에 생명을 불어넣으려고 지난 32년 동안 고심해온 양복명장 하석근씨(51·사비로 양복점·서울 소공동 112의34)의 손끝은 오늘도 재단대 위를 날렵하게 움직인다. 『「양복장이」의 눈으로 볼 때는 「살아있는」옷과 「죽어있는」옷의 차이가 뚜렷합니다. 상의 깃 하나만 봐도 힘과 정성을 다해 만든 옷은 날아갈 듯합니다.』
옷을 입어도 입은 것 같지 않게 가볍고 남이 보면 옷이 탄력이 넘치면서 입은 사람과 일체가 되는 게 살아있는 옷이라고 설명하는 하씨는 옷에 생명을 주기 위해선 만드는 이의 모든 힘과 혼을 기울여야만 한다고 했다.
하씨는 옷을 찾아가려고 온 고객이 흡족해 해도 자신이 볼 때 불만스러운 부분이 있으면『죄송하지만 그냥 놓고 가라』고 한 뒤 다시 손을 본다.
하씨가 양복을 만들면서 터득한 「생명철학」은 천의 올을 바르게 연결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또 봉제과정에서 보이지 않는 부분의 속처리를 꼼꼼하고 정연하게 해야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소매를 어깨에 붙일 때도 소매가 날아가서 달라붙은 것처럼 보이도록 하고 재단을 할 때도 봉제과정에서 뜨거운 다리미의 열로 인해 천이 변화할 것을 고려해 선을 긋는다.
하씨의 양복기술은 73년 영국에서 열린 「세계주문양복업자 패션쇼」에서 25개국 4백60점의 출품작 가운데 「베스트 9」에 선정될 정도의 국제최고수준이다.
하씨가 양복업계에 특히 크게 기여한 점은 양복 전체의 곡선에 여유를 주면서 곡선의 폭을 길게 해 서양인에 비해 둥글둥글하고 아담한 우리나라 남성들의 체형에 어울리는 맵시를 창안한 것.
하씨는 양복의 안감과 겉감 사이에서 옷의 균형을 잡아주는 심지를 종전 4겹에서 2겹으로 줄이는 등 양복의 무게를 종전보다 20∼30% 가볍게 하기도 했다.
하씨는 19세이던 59년 가정형편으로 마산 창신고를 중퇴하고 「기술을 배워야겠다」는 일념으로 양복업계에 입문했다. 양복기술을 배우면 옷을 멋있게 입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게 동기였다.
그는 처음 선배기술자들의 점심 나르기, 저녁시간의 술 심부름, 숯다리미의 불피우기 등 잡일로 양복점 일을 시작했다.
『기술을 배우려면 얻어맞아도 당연한 것으로 알았다』고 초년기를 회상한 그는 『그만큼 기술 배우기는 힘들었다』고 했다.
하씨는 심부름 단계를 끝내고 봉제를 배우면서 기뻐 기술자들이 다 퇴근한 뒤에도 혼자 남아 선배들이 남긴 일을 해보다 그르쳐 다음날 아침 야단을 맞은 적도 한 두번이 아니었다.
마산에서 2년여 봉제를 배운 하씨는 61년 상경, 양복점을 돌며 7∼8년 봉제를 한 뒤 명동보라매양복점에서 박태하씨로부터 비로소 재단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는 이때 아현동 하숙방에서 자신이 입던 옷을 다 뜯어 불편한 원인 등을 밝혀 내거나 옷의 스케치를 해보면서 밤을 새우곤 했다.
하숙집에서 명동까지 걸어다니면서 그는 『비록「양복장이」의 길이 화려하지 않고 고난의 길일지라도 내 한 몸 바쳐 세계최고의 재단사가 되겠다』고 마음속 깊이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현재 한국복장기술경영협회 감사를 맡고 있는 하씨는 『이제는 내가 터득한 기술을 후배들에게 잘 전수시켜 주는 게 남은 과제』라고 새해포부를 밝혔다. <이영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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