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를 넘기는 미제사건들(사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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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올해도 우리들을 놀라게 했던 많은 사건들이 「미궁」에 빠진채 해를 넘긴다. 새해가 시작되자마자 일어났던 이형호군 유괴사건은 어린 생명이 한 줌의 재로 변해 강물에 뿌려진지 1년이 되어오지만 범인의 윤곽조차 잡지 못하고 있고 개구리를 잡으러 나섰다가 실종된 다섯 어린이의 행방도 깜깜 무소식이다.
그뿐인가. 화성에 살인사건이 난것이 올해로 6년째이지만 단 한건의 사건도 해결되기는 커녕 올해 다시 두건의 살인사건이 새로 발생한채 수사는 여전히 지지부진이다. 또 이번달 들어 서울에선 한동네에서 새벽에 연쇄적인 살인사건이 일어났으나 역시 경찰은 아무런 단서도 찾지못해 영구 미제사건이 될 가능성이 커졌다.
이들은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킨 사건일뿐 그밖에도 해결되지 않은 작은사건들은 부지기수다.
하기는 숙제로 넘기고 말게된 것은 범인을 모르는 사건들만은 아니다. 엄연히 범인이 밝혀져 있고 적극적인 수사를 요구하는 여론이 빗발쳤는데도 해결이 안된 사건들도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고문 기술자 이근안사건이고 수서비리나 오대양사건 같은 것도 일반은 사건의 전모를 짐작하고 있고 그래서 더 철저한 수사를 요구하고 있는데도 덮어버리고 해를 넘기는 사건들이다.
알지 못해 해결 못하고 알고서도 이런저런 이유로 해결을 못하고…. 이래서 우리 사회엔 미해결의 장만 쌓인다.
과연 이래도 될 일인가. 이 과학의 시대에,한꺼번에 5명의 어린이가 행방불명되었는데도 생사조차 알 길 없어서야 어찌 선진사회로 발돋움한다 할 수 있을 것인가.
우리 사회의 가치관의 혼란,무질서,법의 무력화,극심한 이기주의와 탐욕 등이 이들 미해결의 사건때문만은 아니다 적어도 그 한가지 요인이 되고 있음은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정부는 「범죄와의 전쟁」까지 선포하는 의지를 보여주었으나 결과는 국민의 기대에 턱없이 모자란다는 것을 스스로도 인정하고 있다. 그것을 다시한번 입증하려는듯 경찰의 방범비상령속에서도 이번 세밑에도 각종 범죄사건이 꼬리를 물고 있다.
의지만으로는 안된다. 공권력이 위엄을 세우고 그 기세에 눌려 범죄가 다소나마 고개를 숙이게 하려면 최소한 사회적 이목을 집중시켰던 사건은 해결해내야 한다. 당국은 그동안 범죄 억제책의 하나로 형벌을 강화해 왔지만 그것이 효과가 없음은 이미 드러났다. 가장 효과적인 억제책은 역시 검거율을 높이는 것임은 모두가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해가 바뀌었다고 해서 미해결 사건에 대한 추적의 고삐를 늦추어선 안된다. 해결이 장기화되는 한이 있더라도 수사는 계속되어야 한다. 사건을 해결하고야 말겠다는 의지와 꾸준한 노력 자체가 사건의 해결에 못지않은 범죄억제력을 갖는다.
많은 사건들이 미궁에 빠지게 되는 직접적인 책임은 넓게는 범죄의 생성요건을 줄여나가지 못하는 정부,좁게는 수사력이 부족한 경찰당국에 있겠지만 일반 국민들이 책임져야할 부분도 없지 않다.
우리들은 범죄에 대해 사회 구성원으로서 책임과 도덕적 의무에 과연 어느정도 충실한가. 각자가 이에 대해 스스로에게 물어볼 필요가 있다. 이웃집에 강도가 들어도 자기집만 무사하면 나몰라라 하는 것이 우리들 아닌가. 아니 버스나 지하철에서 소매치기를 당한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도움을 요청해도 외면해 버리기 일쑤인 것이 우리들 아닌가.
이런 극도의 이기주의,박약한 시민의식을 지닌채 경찰의 무능만을 탓하는 것은 또 하나의 이기주의 이외에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범죄의 요인은 모두가 함께 힘을 합쳐 제거해 나가야 할 것이지 경찰만의 책무는 아니다.
당국도,일반 국민도 91년이 남기고 있는 숙제에 다시 관심을 모으자. 미궁에 빠진 사건의 해결에 힘을 합치는데서부터 이 사회의 정의와 질서의 기준을 확립해 나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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