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포기없는 「합의」 실현될까(사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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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남북한 합의서의 서명은 그 자체가 역사적인 성과이기도 하지만 새로운 남북한 관계의 시발점이기도 하다. 합의서 채택으로 화해와 협력의 틀은 마련됐지만 이제 남북한 당국자들이 어떻게 서로 신뢰하며 운용하느냐에 따라 남북관계의 장래가 달려있다.
이러한 출발점에서 당장 우리가 관심을 갖는 것은 북한의 신뢰성 문제다. 지금까지 우리에게는 여러면에서 북한이 신뢰하기 어려운 상대라고 여겨져 왔었다.
이번 합의서 서명의 흥분이 가라앉으면서 또다시 그러한 문제를 우리는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북한의 핵사찰수용문제에 대한 태도때문이다.
남북한 관계가 합의서 내용대로 실질적으로 개선될 수 있을까 하는 전망은 북한이 우리 정부의 비핵화 공동선언에 어떠한 반응을 보이느냐로 가늠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 반응에 따라 북한의 신뢰성을 확인해 보는 계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남북합의서 서명과 함께 북한의 핵문제가 별개의 문제로 다루어지고 추후 따로 협의하기로 한데 대해 일부에서는 우려가 일고 있다. 우리정부측에서 「합의」라는 모양만들기에 성급한 나머지 핵문제를 너무 소홀히 다루지 않았느냐 하는 지적이다.
합의서 서명과 핵문제를 연계시키지 않음으로써 북한이 앞으로 이 문제를 질질 끌게할 수 있는 여유를 주었다는 분석이다. 계속 미국과 일본을 상대로 핵카드를 이용하고 싶은 북한이 쉽사리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이러한 분석의 근거는 북한이 이미 핵사찰 수락조건과 관련해 여러차례 말을 바꾸어 왔기 때문이다. 엉뚱한 조건을 내세웠다가 그 조건이 충족되면 또 다른 조건을 내세우는 등 국제사회를 우롱하듯 행동한 것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그래서 이번 5차고위급회담에서 이 문제와 관련된 북한의 태도는 또다시 그러한 행동을 할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그들이 몇차례 말을 바꾸어 주장해온 「남북한 동시핵사찰」을 우리측이 수용하겠다며 비핵화 공동선언을 하자고 제의한데 대해 그들이 당황해 옳다,그르다는 반응을 보이지 못한데서 그런 의심을 더하게 됐다.
진정 동시핵사찰에 의한 핵개발포기의사가 있었다면 원칙적으로라도 대뜸 「찬성한다」는 말이 나와야 순리일 것이다. 그들이 일방적으로 무리하게 주장해 오던 요구를 들어주겠다는데도 선뜻 응하지 못하는 것은 다른 꿍꿍이속이 있지 않느냐는 의심을 사기에 충분한 일이다.
이러한 우려가 나오는 것은 그동안 북한의 언행이 어긋나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곧 남북한대표가 핵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갖게될 회의는 앞으로 북한의 태도를 가늠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만약 핵사찰문제와 관련해 또 다른 조건을 내세우고 질질 끈다면 이는 곧장 남북합의서의 실현에 부정적으로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신뢰없는 북한과의 약속이란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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