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노트북을열며

민간기업서 살아남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4면

대기업 A차장. 그는 올 초 헤드헌터로부터 솔깃한 제의를 받았다. 공기업 부장으로 오라는 제안이었다. "정년은 보장해 준다"는 말에 굉장히 고민했다. "이번에 옮기게 되면 벌써 세 번째 직장이 되는데…." 가족, 친한 선배들과 며칠간 상의했다. 그러나 결론은 잔류. 이유를 물었다. "안정적으로 살 수는 있겠죠. 그러나 지금의 직장에서 해야할 일이 있고, 또 잘할 자신도 있어요." 그러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는 쾌감은 오히려 저에게 득이 되지 않겠습니까?" 물론 친구들은 비웃었다고 했다. 좋은 기회를 발로 차버렸다고. 나중에 회사에서 잘리면 후회막급일 거라고. 그래도 그는 꿋꿋하게 "내 장기가 있어 괜찮다"고 응수했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그에게는 천부적인 파이터 기질이 있다. 모험을 즐길 줄도 안다.

3월의 절반이 지났다. 얼추 대기업들의 인사도 마무리되고 있다. 연말연시 임원부터 시작된 인사철은 봄바람을 타고 직원인사까지 매듭짓고 있다. 승진의 기쁨에 표정관리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 반대도 많다. 갑작스러운 해고 통보에 짐을 싼 상무, 진급이 안 돼 이직을 심각하게 고려 중인 고참 부장…. 사기업에 몸담고 있는 사람이라면 인생 이모작을 하든가, 생존하는 법을 배워야 하는 신세다. 하긴 공기업이라고 대수랴. 울산시, 서울시처럼 철밥통이라는 공무원 세계도 급변하는 요즘이다. 공기업이 이럴진댄 민간기업 직장인은 더 불안하다. 별 재주가 없으면 답답하기만 하다. 운에 기대야 하는지, 줄이라도 꽉 잡아야 하는지 말이다.

지난주 두산인프라코어 김용성 사장(전략담당)을 만났다. "얼마 전 임원회의를 주재했을 때야. 한 주제를 놓고 임원 둘이 격렬하게 치고받더군. 그러더니 배가 점점 산으로 가는 거 있지. 그런데 가만히 듣고 보니 둘의 주장이 똑같더군. 참다 못해 '결국 같은 얘기 아닙니까'라고 끼어들었더니 두 사람이 머쓱해하더라고." 그러면서 그는 "요즘 직장에서는 커뮤니케이션이 참 중요해. 직장생활의 반, 아니 인생의 반이야"라고 말했다. 이것은 그의 성공 비결이기도 했다. 김 사장은 평범한 직장인 출신이다. 도중에 유학을 다녀와서는 경영 컨설턴트로 일했다. 이후 두산에 스카우트돼 현재의 위치까지 올랐다. 그는 사안의 중요성을 정확히 짚어내는 데 탁월한 능력이 있다.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회사에 이를 제대로 전달함으로써 올바른 결정을 내리도록 하는 재주가 더 크다. 먹는 산업 위주의 두산이 중공업 중심으로 과감하게 전환한 데는 그의 역할이 컸다.

그의 말을 들으니 우리나라 벤처 원조세대 조현정 비트컴퓨터 회장(전 벤처기업협회장)이 들려준 생뚱맞은 얘기가 떠올랐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속담은 잘못됐어." 그의 해석이 걸작이다. "겸손 떤답시고 자기의 능력을 60,70%밖에 발휘하지 못해봐. 아마 땅을 치고 후회할 걸. 잘난 체나 아부하라는 게 아니지. 실력을 쌓되 이를 제대로 널리 알려서 회사에 기여토록 하라는 거야. 그게 본인도 출세하는 길이요, 회사도 발전하는 길 아니겠어?"

샐러리맨에서 정상까지 오른 김 사장이나 오너인 조 회장 모두 요즘 직장에서의 생존법을 '통(通)'에서 찾고 있는 셈이다. 영업통.중국통 같은 전문실력통(通)에 그치지 않고,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의사소통(通)을 결합시킨. 나흘 전 A차장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저, 부장으로 승진했습니다." 너무 반가왔다. 안정(공기업 스카우트 제의)을 마다하고 모험(민간기업 잔류)을 선택한 그에게 조언 한마디. "통(通)하라."

정선구 경제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