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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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얼마전 여러분야의 학자들이 공동으로 참여하는 학술세미나에 참석한 적이 있는데 외국에서 학위를 받고 갓 귀국한 어떤 청년학도가 자신을 「철학자」라고 지칭하는 것을 듣고 아연했다. 사실 어떤 소장학자가 자신을 「역사학자」라고 지칭한다면 교만하다는 느낌은 주어도 혐오감을 일으키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보통사람은 「철학자」라면 공자나 소크라테스 같은 도통한 인물을 떠올리기 때문에 젊은 청년이 자신을 「철학자」라고 하면 심한 역겨움을 느끼게 된다. 이것이 철학도들의 특수한 불리점일수는 있다. 그러나 누구든 20대에 자신을 이미 「철학자」로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앞으로 어떻게 겸허한 마음으로 학문에 정진해서 대성할수가 있을 것인가.
이 청년은 그 이외에도 자신의 큰아버지뻘이 되고도 남는 타 학계의 석학을 농담하는 체하고 「아무개」하고 이름을 부르는 등 해괴한 작태를 많이 부렸다.
나는 그 청년이 앞으로 선배들에게 몇번 크게 혼나면 정신을 차릴 것이고, 아니면 요즈음 선배들은 후배를 잘못 건드렸다가 봉변당할까봐 시건방진 후배를 나무라기보다 슬슬 피하는 형편이므로 계속 기고만장해 날뛰다가 학계에서 모두가 기피하는 인물이 되어버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학회의 또 다른 어떤 참석자는 그 모임의 대부분참석자들이 매우 감명깊게 듣고 많은 것을 배운 어떤 발표에 대해 『문학과 환경과 역사를 연결시키다니 그건 말이 안된다』는 식의 논평을 했는가하면, 또 한 참석자는 주제발제자의 논문에 대해 그것은 주제발제라고 볼수가 없다는 논평을 했다.
남이 열심히 준비해 발표했고, 또 다른 사람들이 많이 배운 그런 논문에 대해서 논평을 할 때에는 『내 생각에는 문학과 환경을 연결시키는 것은 양자의 이러이러한 특성 때문에 무리라고 본다』든가 『나는 주체발제에서 이러이러한 것을 기대했는데 그런 점이 결여되어 내 기대에 어긋났다』는 식으로 정당한 이유를 제시하면서 학문적 발전에 도움이 될수 있는 논평을 해야할 것이다. 학문하는 사람이 남의 논문을 무조건 깎아내리고 가치를 부정하는 식의 발언을 학술세미나에서 해서는 안될 것이다.
남을 격하시키면 자기가 올라가고 남의 논문을 깎아내리면 자신의 학문적 수준이 높다는 인상을 줄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학자로 자처하는 사람들 속에 아직도 많다는 사실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서지문<고려대 교수·영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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