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안보환경변화 적극대응/베이커의 「2+4」구상 왜 나왔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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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유럽식 다자협력 방식을 적용/북한 핵포기 4강의 공동노력 겨냥도
제임스 베이커 미 국무장관이 포린 어퍼어스지에 기고한 글에서 밝힌 남북한 및 미국­소련­중국­일본 주변4강국 6자회의 구상은 사실 새 아이디어는 아니다.
헨리 키신저 전 미 국무장관이 이미 70년대에 남북한 교차승인을 통한 한반도 안정화를 위해 주변4강국의 4자회담을 제시한 것을 필두로 여러 국제정치 학자들도 비슷한 구상을 아이디어차원에서 거론했다.
꼭 6자회의 또는 4자회의라는 구도는 아니지만 소련이 고르바초프 대통령의 블라디보스토크 선언후 아시아안보회의를 제의한 것도 아류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특히 노대통령이 지난 88년 유엔연설에서 제시한 남북한과 주변4강국이 참여하는 동북아평화협력의회 제안은 베이커의 구상과 거의 맥을 같이 하고 있다.
단지 노대통령의 동북아평화협력의회는 그 범위가 한반도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4강의 힘이 집결돼있는 동북아 전체를 포괄하는 좀더 확대된 구상이었다.
그러나 결국 4강국의 이해가 한반도에서 교차한다는 점에서 볼때 노대통령의 제의나 베이커 국무장관의 제의는 거의 일치된다고 볼 수 있다.
노대통령은 이같은 제의를 하면서 외교채널을 통해 이의 성사를 위한 미국의 지원을 요청했었다.
당시 미국은 한국의 제의를 「좋은 아이디어」라고만 할뿐 적극적인 지지를 보내지 않았다.
당시 미국은 노대통령의 이같은 구상이 소련의 아시아 안보회의와 닮지 않았느냐는 인식이 있었다.
동북아안보와 관련해 이같은 다자회의가 생길 경우 자론될 것이고 그 경우 태평양 해양국가로서 이 지역에서 월등히 우세한 해군력을 갖고 있는 미국이 이의 감축압력을 받게 될 것이라는 계산이 있었다.
또 이 지역의 핵문제가 거론될 수 밖에 없는데 당시는 북한의 핵개발이 주의를 끌때가 아니어서 자연히 주한 미군의 핵이 문제가 될 것으로 보았다.
이런 이유때문에 이를 마땅치 않게 생각하던 미국이 3년여를 지나며 태도가 바뀐 것이다.
가장 큰 변화는 소련의 붕괴로 인한 냉전구조의 종식이며 다른 요인은 북한의 핵개발이다.
이 지역에서 미국의 존재를 부담으로 여기던 소련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동북아에 배치된 군사력도 줄일 수밖에 없는 소련으로서는 그 힘의 공백을 중국이나 일본이 메울 경우 오히려 더 직접적인 위협이 된다고 판단하고 있다.
따라서 역설적으로 이 지역에서 미국의 존재가 더 필요하게 됐다.
태평양국가로 남아있겠다는 미국으로서도 동북아의 개입이 불가피한데 그 개입방식이 냉전구조 때와는 달라져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소련의 팽창정책을 의식해 맺어진 한­미,미­일 안보조약 등 양자 안보구조를 유럽안보협력회의(CSCE)와 같은 다자구조로 바꾸어 이에 참여하는 것이 오히려 합리적이라는 평가를 내린 것이다.
미국으로서는 이질적인 요소가 많은 아시아를 유럽안보협력회의와 같이 한데 묶기는 어렵고 동북아,특히 한반도를 국한시킬 경우 이러한 다자간의 평화구조가 가능할 것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베이커 국무장관이 한반도에서 유럽식의 재래식무기 감축협상이 가능하다고 제시한 것도 이러한 유럽의 모델을 의식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와 연계된 것이 북한의 핵개발 문제다.
미 일은 물론 중 소까지도 북한의 핵보유가 이 지역 안정을 위협한다는 판단을 갖고 있는 상황이어서 이러한 다자회의를 구성하는 과정을 통해 북한에 압력을 넣을 수도,달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북한의 안보를 4강국이 보장한다는 방식으로 핵개발을 포기케 할 수도 있는 것이다.
베이커가 6자회의를 제시하며 주변 4강국의 「공동의 안보관심사(Common Security Concerns)」를 논의할 수 있다는 대목이나 남북대화의 결과를 4강국이 보장한다는 언급등이 이를 의식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미국도 이러한 다자회의가 궁극적으로 남북한이 통일을 이루고자 할때 독일의 경우처럼 이해가 관련된 4강국이 이를 보장하는 방식으로 이용될 가능성을 배제치 않고 있다.
미국은 그러나 이는 먼 장래의 일이고 당장은 미국의 개입방식 변경과 북한의 핵개발 억제에 목표를 두고 있는 듯하다. 따라서 이 6자회의가 우리가 지향하고 있는 평화구조의 정착을 통한 남북한 통일로의 접근과정으로 보기는 아직 이르다.
문제는 남북한이 어떤 합의를 도출할 수 있느냐가 과제며 이것이 4강의 이해와 배치되지 않을 경우 이들의 보장이 가능할 수도 있다는 정도다.
따라서 6자회담이 4강대국의 논리로 전개되지 않기 위해서는 남북한이 이를 주도할 수 있느냐 여부가 관건이다.<워싱턴=문창극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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