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층 사칭,피해자도 책임있다(사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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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최근 권력기관,특히 청와대비서관을 사칭하는 사기사건이 잇따라 발생하고 있어 사회의 경각심이 요구된다.
26일 청와대 정치자금 담당관과 사정비서관을 사칭하는 일당 5명이 중소기업등 20여개 업체를 상대로 대출금의 20%를 정치자금으로 헌납하면 은행대출을 알선해 주겠다며 교제비조로 1월5천만원을 가로채는 사건이 있었다. 이같은 은행대출 사기는 지난 2일 붙잡힌 일당 9명의 경우와 수법이 똑같다.
지난 4일에는 청와대와 안기부 고위간부를 통해 국유림과 시유지를 불하받게 해주겠다며 교제비 명목으로 7억여원을 사취한 사기범이 검거되기도 했다. 10월 한달동안 이와 유사한 사기사건이 매스컴에 보도된 것만 해도 모두 9건인데 이 가운데 청와대 고위직 사칭이 8건이고 나머지 1건은 검사나 검찰수사관을 사칭하고 약점있는 기업체를 위협해 금품을 갈취한 사기사건이다. 이밖에도 매스컴에 보도되지 않은 사소한 사건들이 이른바 권력층을 사칭하면서 우리사회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으리란 짐작은 어렵지 않다.
물론 사기를 치고 다니는 사기꾼들의 범죄행동은 엄중한 법의 단죄를 받아 마땅하고 일벌백계로 다스려 그 뿌리를 뽑아야 한다. 그러나 이들 사기꾼의 사기에 걸려든 대상들에게도 커다란 잘못이 있음은 지나칠 수 없다.
모든 범죄는 피해자가 일방적으로 생명이나 재산에 위해를 입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사기범죄는 피해자의 이득을 전제로해서 이뤄지기 때문에 피해자가 곧 공범이라는 측면이 없지 않다.
예컨대 국유지를 불하받아주겠다든가,조합주택 부지를 사주겠다,은행돈을 대출받아주겠다,수감된 피의자를 석방시켜주겠다,범법사실을 은폐해주겠다는 등 모두가 사기 피해자의 이익을 비합법적으로 보장해주겠다는 꾐에 자진해서 넘어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사기당하는 쪽의 책임도 큰 것이다.

대부분의 국민들은 정당하고 합리적인 방법으로 열심히 노력해 사업을 하고 생계를 유지하며 돈을 벌어 부를 축적하면서 미래를 설계하는 순리에 따르고 있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불법·부정한 방법으로라도 어떻게 해서든지 나만 잘 살면 된다는 무모한 이기주의자나 일확천금을 노리며 탐욕에 눈이 어두운 사람들이 그런 기회만을 노리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런 사람들의 눈먼 탐욕을 이용해 이들을 등치는 자들이 바로 사기꾼이며 공갈배들이다. 수사관을 사칭하는 자들이나 사이비기자들의 공갈이 먹혀들어가는 토양은 피해자들 스스로가 지니고 있는 약점들이 마련해준 것이다. 그들에게 약점이 없다면 공갈을 무서워할 까닭도 없다.
그러나 사기꾼들이 횡행하고 사기 피해자들이 사기꾼의 농간에 넘어가는데는 사기가 통용될만한 탈법·불법적 방법들이 우리 정치·경제·사회 요소요소에서 관행처럼 돼있다는 국민의 일종의 통념화된 인식에도 원인이 있다. 사실이야 어떻든간에 은행대출을 받으려면 커미션을 바치는 것은 물론 든든한 빽이 있어야 가능하고,무슨 사업 한번 해보려해도 힘깨나 쓰는데서 한마디 해주지 않으면 허가받기가 별따기 만큼이나 어렵고,국유지·시유지를 불하받으려면 권력층의 작용없이는 어림도 없다는 인식이 일반국민에 보편화돼 있는 상황에서는 권력층 사칭 사기꾼이 설치고 다니는 것을 막을 도리가 없다. 이들의 꾐에 걸려드는 피해자들만 나무랄 수도 없을 것이다.
이토록 국민들에게 왜곡된 통념을 심어준 것은 다름 아닌 바로 권력층 자신들이다. 지난날 정치권력이 정치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저질렀던 온갖 탈법·강압적 횡포들이 거듭되면서 국민들은 권력층과 돈을 연계시켜 생각하게 되고,특혜와 이권 뒤에는 반드시 정치권력의 작용이 없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갖게된 것이다. 권력층이 그런 특혜나 이권의 배후를 조종한다는 현실적 사례들은 해마다 증가일로에 있고 공직자의 비리·부정건수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사기꾼의 범죄행각을 근절하는 본질적인 문제는 국민 모두가 합리적이고 정당한 이윤추구를 지향하도록 하는 가치관의 정립이다. 공직자의 기강확립도 선행돼야 한다. 그에 앞서서 사기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이기 위해서 사칭하는 공직자의 신분을 확인할 수 있는 공식적인 창구라도 갖춰야 한다. 흔히 사칭에 이용되고 있는 청와대와 안기부·검찰·경찰·일반 관공서 등에 소속공직자의 신분확인을 전담하는 전용전화의 설치도 방법중의 하나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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