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소 관계 경협늦어져 난기류/말많던 「30억불」 또 파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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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소련/“정치적 목적 챙기고 그만” 강한불만/한국/“소 앞날 불안”… 약속이행 자꾸 미뤄
최근 모스크바 주재 한국대사관 내에는 소련에 대한 한국의 경협문제를 둘러싸고 형성된 미묘한 기류에 대해 우려가 높아지고 있다.
소련측에서 대통령 특사까지 보내면서 한국에 거듭 어려운 경제사정등을 내세워 약속한 경제협력을 금년내에 집행해줄 것을 요구했고,한국측에선 노태우 대통령이 소련측 요청을 최대한 수용하겠다고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약속을 이행하지 않자 소련측은 노골적으로 한국대사관 관계자들에게 불만을 터뜨리고 있기 때문이다.
소련 관리들은 최근 한국 관계자들을 만나기만 하면 경협약속은 어떻게 된 것이냐며 다그치고 있다. 이에 대해 한국대사관은 소련내 정치적 혼란등을 이유로 한국내에서 경협약속의 조기집행에 반대하는 여론이 형성되고 있어 경협이 늦어지고 있으나 『약속은 지킬 것』이라며 모면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이제는 이같은 변명을 너무 자주 하다보니 소련측의 감정을 돋우는 결과만 낳고 있다.
소련 관리들과 주요인사들은 한국이 30억달러의 차관제공을 약속했을 때는 소련의 장래를 낙관했으나 지금은 비관하는 것이냐,차관제공 약속을 한 것이 불과 몇달 전인데 지금와서 약속이행을 미루고 있으니 한국의 대소정책이라는 것이 그렇게 근시안적이냐는 비판까지 나오고 있다.
또 한국이 소련에 접근했을 때 생각했던 것은 경제적 동기보다는 정치적 동기가 더 강했으며 이제 한국이 정치적 목적을 어느정도 달성하고 나니 경제적 이유만으로 약속을 이행하지 않으려하고 있다고 비난한다.
주지하다시피 한국이 경협을 제공하기로 결정하던 그때나 지금의 소련 경제사정은 똑같이 어렵다. 경협을 제공하기로 결정했던 당시도 소련경제는 단기간에 회복이 불가능한 상황이었으며 정치도 상당기간 혼란이 계속되리라는 것은 명약관화했다.
때문에 대부분 국가들이 대소 투자 또는 경협을 꺼리고 있었으며 국내에서도 대소 경협제공을 반대하는 주장이 존재했던 것이다.
당시 정부내 경협제공파의 논리는 한국이 소련과 수교하고 소련의 경제개혁에 기여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한국의 국익에 도움이 될 뿐 아니라 통일을 앞당기는데에도 크게 기여할 것이라고 주장했고 이 주장이 반대주장을 압도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소련과의 수교,남북한 유엔동시가입 등이 이뤄진 지금 대소 경제협력 집행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이유를 소련의 불확실한 경제와 정치에 돌리고 있으니 소련측이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소련정부 주요관리들은 과거와 달리 한국에 대해 섭섭한 감정을 토로하고 있으며 몇몇 관리들은 우리측 인사들을 잘 만나려하지 않을 정도다.
이같은 분위기는 지난 3일 모스크바 메트로폴 호텔에서 개최된 개천절기념식때 그대로 드러났다. 한국대사관에서 소련정부 각료들과 주요 인사들에게 초청장을 발송했음에도 불구,이날 기념식에 소련 각료들은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연방정부 각료들 뿐만 아니고 러시아공화국 정부관리들도 찾아보기 어려웠다.
주요인사를 굳이 꼽자면 소련 외무부 동아시아 담당 로가초프 차관을 비롯한 한국과 소속 직원들 뿐이었다.
이날 행사 뿐 아니라 최근 열렸던 몇몇 행사에서도 소련인들은 노골적으로 섭섭함을 표시하고 있다.
최근 한국대사관에서는 이 문제에 대한 대책을 놓고 심각한 내부 토론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공노명대사는 경제기획원·재무부·상공부 등에 최소한 금년에 집행하기로 약속한 경협만이라도 약속대로 조기 이행해달라고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모스크바 현지에서 활동하고 있는 상사직원들·무공관계자들도 대사관의 현실인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들의 공통된 인식은 일단 한 약속을 초기부터 지키지 않을 경우 앞으로 한소관계는 상당한 진통을 겪을 것이라는 것이다.
한소관계에 「뜨거운 감자」로 부상한 대소 경협문제가 어떻게 해결될지 귀추가 주목된다.<모스크바=김석환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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