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이준관씨의 『가을 떡갈나무숲』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0면

폭염이 걷히고 난 뒤 바람은 갑자기 서늘함을 품어안는다. 서늘한 바람이 스쳐지나간 숲속 풀떨기 속을 헤쳐보면 거기 지난 여름의 폭염이 익힌 빨간 열매 몇 개가 오롯이 숨어 있다. 그 열매들은 폭설이 내린 뒤 먹을 것을 찾아 헤매는 날짐승들의 좋은 먹이가 될 것이다.
이 가을에 좋은 시들과 시집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다. 고진하의 「프란치스코의 새들」 「눈폭풍의 덫에서 풀려난 뒤」, 허언의 「곡마단」 「상계동」, 권진규의 「장례식」(이상 『현대시세계』가을호) 같은 시들은 쉽게 만날 수 없는 우수한 작품들이다. 엄원태시집 『침엽수림에서』,박기영시집 『숨은 사내』(이상 민음사간), 이준관시집 『가을 떡갈나무숲』(나남간)들도 이 가을에 거둔 훌륭한 수확임에 틀림없다.
그중에서 미당과 백석이 빼어나게 보여준 바 있는 토착정서 시들의 맥을 잇고 있는 이준관의 『가을 떡갈나무숲』을 이달의 작품으로 골라낸다. 놀랍게도 이 생소한 이름의 시인은 등단한지 이미 열일곱해나 된다. 그동안 묻혀 있던 시인이다.
우리가 통과해온 지난 80년대의 피비린내 자욱한 그 가파르고 숨가쁜 질곡의 세월은 이준관의 <간장을 뜨다가, 아낙은 장독가 석류꽃에게 다정히 말을 건넨다. 소가 제 큰 눈망울로 외양간을 아늑히 채우고 다소곳이 하루의 무릎을 접는곳, 아, 나의 고요한 기쁨이 여기 여기에 있다.>(「동구밖」)와 같은 서정시들이 발붙일 데를 허락하지 않았다. 아예 그런 서정시들의 숨통을 틀어막고, 뿌리를 잡아채어 뽑아버렸다. 그래서 이준관은 숨소리도 크게 내지 않고 구석진 곳에 숨어있었나 보다. 그랬기 때문에 누구 하나 눈여겨 보아 주지않는 응달진 곳에서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자기 세계를 오롯이 익혀낼 수 있었나 보다.
『가을 떡갈나무숲』을 관통하고 있는 것은 자연과 자연의 섭리에 순응하고 사는 사람들에 대한 관조와 긍정의 따뜻함이다. 시인의 눈길이 스칠 때 자연은 그냥 자연이 아니다.

<떡갈나무숲에 남아 있는 열매 하나. 어느 산짐승이 혀로 핥아보다가, 뒤에 오는 제 새끼를 위해 남겨 놓았을까? 그 순한 산짐승의 젖꼭지처럼 까맣다.> (「가을떡같나무숲」)처럼 자연은 약육강식의 동물적 힘의 논리만 있는 곳이 아니다. 때로 생명 있는 것들이 먹을 것들을 나누며, 서로 공존할 수 있는 사랑과 지혜가 무엇인가를 인간에게 가르치기도 한다.
이준관의 시세계는 꽃을 따라 벌통을 짊어지고 산에 들어온 사내 (「가을 산운」)와 마당가에 앉아 한평생 병아리에 모이를 주며 살고 싶은 이 (「마당가에 앉아」), 곤히 잠든 어린 것들 머리맡에서 콩깍지를 까며 콩바구니에 콩같은 희망을 말없이 채우는 두 내외 (「인가의 불빛」)들의 삶, 그 음영과 애환을 담고 있다.
시인 이준관이 애써 복원해내는 것은 거창한 역사의 진실이 아니라 어느 한군데 온전하게 남아 있지 못한 채 이그러지고 가난에 찌든 우리의 고향 풍물들과, 잘난 구석 없어도 저마다 타고난, 제 분수껏 사는 순박한 고향사람들, 또 어김없이 순환하는 절기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자연과, 그 안에 둥지 틀고 깃을 접고 알을 품고 새끼를 기르는 짐승들의 작고 질박한 세계다. 시인은 왜 번거롭게 얽혀 있는 사람들의 세계보다 자주 자연에 마음을 빼앗기게 될까. 그것은 자연이 시인이 꿈꾸고 있는 억압과 갈등없는 세계의 한 원형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장석주 <문학평론가>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