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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희망찾기] “단단해진 ‘손맛’으로 회사 키울 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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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중앙IMF 외환위기 직후 대우자동차는 생산직 노동자 1,728명을 정리해고했다. 회사는 “사정이 좋아지면 다시 찾겠다”고 했지만 아무도 믿지 않았다. 지난해 5월, 회사는 이 약속을 지켰다. 그중 3인의 ‘희망’ 이야기.“그날을 어떻게 잊겠습니까?”



GM대우 부평공장에서 만난 이완기(49) 씨는 5년 전 이야기가 나오자 한숨부터 쉬었다.

“회사가 어려워 2개 조 중 1개 조가 없어질 것이라는 말은 진작부터 들어서 알고 있었습니다. 당시 저는 직장이었는데, 직장 두 명 중 한 명은 정리해고될 것이라는 말이 공공연하게 돌았죠.”

이씨는 동료 직장과 둘이 농담 삼아 ‘너 아니면 나’라고 말하고는 했지만, 속으로는 ‘설마 나는 아니겠지’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2001년 2월, 야간 근무를 위해 출근한 그에게 회사는 정리해고 통지서를 건넸다.

“각오하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현실이 되니 말 그대로 청천벽력이었죠.”

정리해고 5년1개월 만에 전원 복직

20 세에 입사해 23년을 바친 대우자동차는 그에게 생활의 중심이자 모든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날 이후 다시는 공장 안으로 들어갈 수조차 없었다. 강제 정리해고에 반발하는 노조의 농성을 막기 위해 회사가 용역직 경비까지 동원해 공장을 완전히 봉쇄했던 것이다.

1주일 동안은 집에서 한 발자국도 안 나가고 하루 종일 컴퓨터 앞에만 앉아 있었다. 친구들과의 연락도 끊었다. 아내는 등산이라도 가라고 했지만, 그는 그조차 가지 않았다. 낮에 등산을 간다는 것 자체가 실업자가 됐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만큼 그는 자신의 실업을 인정할 수 없었다. 젊은 시절 전부를 바친 회사가 자신을 배신했다는 생각에 자다가도 벌떡벌떡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렇게 두어 달을 보내다 고용지원센터를 찾았다. 기술이 있는 만큼 어디든 취직할 수 있겠거니 하는 생각이었다. 대기업 출신이라는 자부심도 있었다. 그러나 현실의 벽은 높았다.

“대우자동차 한 곳에서만 1,700여 명의 실업자가 쏟아져 나온 탓에 인천 남동공단도 이미 포화상태였습니다. 더구나 망한 회사 출신이라고 해서 대우 해직자들에 대한 거부감도 만만치 않았고요.”

장 사를 해 볼까 고민했지만, 20여 년을 월급쟁이로 살아온 터여서 엄두가 나지 않았다. 결국 얻은 자리가 한 공연장의 기계수리부. 그것도 나이가 많다고 처음에는 퇴짜를 맞았다. 그러나 아무도 못 고치던 기계를 척척 고쳐내자 이내 보는 눈이 달라졌다.

“기계라는 것이 다 똑같잖아요. 음향기계는 처음이었지만, 뭐 자동차보다 간단합디다.”

대우에 다닐 때보다 급여는 비교할 수 없이 낮았지만, 더 이상 자존심을 세울 때가 아니었다. 너무 열심히 일한 탓일까? 툭하면 고장 나기 일쑤던 음향장비들이 그가 입사한 지 1년 만에 제 성능을 찾아갔다. 공연장의 음향이 좋아졌다는 칭찬이 들려왔지만, 그는 오히려 역풍을 맞았다. 회사에서 경영혁신을 이유로 그에게 암묵적으로 사표를 종용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버텼다. 만 45세가 넘은 그가 경력직으로라도 갈 수 있는 곳은 아무 데도 없었기 때문이다. 스스로 이 사회에서 더 이상 필요없는 인간이라는 자괴감이 밀려올 때쯤 GM대우로부터 복직 전화를 받았다.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5년간 자신을 버려뒀던 회사에 대한 분노도, 미움도 없었다. 그저 고마울 뿐이었다.

GM대우 노사일지

1998년 8월 대우차 포함 대우계열사 12곳 워크아웃 결정
2000년 1월 채권단과 워크아웃협약 체결
10월 GM, 대우 인수의향서 제출, 11월 최종부도
2001년 2월 1,725명 정리해고
2002년 296명 복직
2003년 412명 복직
2004년 229명 복직
2005년 89명 복직
2006년 579명 복직

“퇴사하며 다시는 대우 쪽은 쳐다보기도 싫었습니다. 2년 전에는 아예 대우와 인연을 끊는다는 각오로 인천에서 파주로 이사까지 했죠.”

그러나 복직 전화를 받는 순간 대우에 대한 분노는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하지만 그는 “아직도 노란 봉투는 쳐다보기도 싫다”고 덧붙였다.

GM 대우는 대우자동차 시절이었던 1990년대 후반 분규 많은 사업장의 ‘간판스타’였다. 외환위기 때 노조는 투쟁만이 살 길이라는 각오로 사측과 대립했다. ‘(생산을) 끊겠다’는 노조위원장의 통보 전화 한 통이면 회사의 생산라인이 완전히 멈추고는 했다.

1 년에 파업일수 100일을 넘기는 해도 있었다. 결국 대우자동차는 2000년 11월 최종부도처리됐고, 2001년 2월 부평공장 생산직 1,725명이 정리해고됐다. 회사는 “사정이 좋아지면 다시 찾겠다”고 약속했지만, 아무도 이 약속을 믿지 않았다.

그 러나 회사는 약속을 지켰다. 2002년 10월 대우차를 인수한 GM은 회사 사정이 좋아질 때마다 많게는 수백 명, 적게는 수십 명씩 복직시키기 시작했다. 돌아온 사람들은 신명나게 일했다. 그 덕분이었는지 판매량도 따라서 늘었다. 선순환이었다.

3년 만에 경영 정상화를 이룬 것은 물론, 예상보다 1년 빨리 흑자를 냈다. 2005년 10월에는 대우인천차(옛 대우자동차 부평공장)도 인수해 자동차 생산 완전가동체계를 구축할 수 있었다.

그 리고 마침내 지난해 5월2일, 정리해고한 1,725명 중 복직을 희망하는 1,604명 전원을 복직시켰다. 회사는 옛 해고자를 찾기 위해 관공서에 부탁해 주소지 추적까지 했다. 정리해고자 전원을 복직시킨 사례는 국내 기업으로는 GM대우가 유일하다.

이 완기(49)·장병재(47)·방종욱(44) 씨 등은 모두 지난해 마지막 복직자 명단에 들어 복직했다. 이들에게 지난 5년은 돌아보고 싶지 않은 기억이다. 장병재 씨는 정리해고 당시 이야기가 나오자 말을 꺼내기도 전에 눈가부터 젖어들었다. 그는 “지금 생각하면 지난 5년을 어떻게 견뎠는지 모르겠다”고 말한다.

2001년 2월 ‘노란 봉투’를 받은 사람은 그가 아니라 그의 아내였다. 그는 인정할 수 없었다. 열성 노조원은 아니었지만, 정리해고 철회 농성에 합류하기 위해 공장으로 돌아갔다. 이대로 그냥 물러서기에는 너무 억울했다.

그 러나 이미 공장은 무장한 경찰이 몇 겹으로 포위하고 정리해고자들의 공장 출입을 막고 있었다. 노조원의 공장 출입을 허가한 법원의 허가서와 변호사를 대동했지만, 무장 경찰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공장 앞에서 승강이가 벌어졌고, 그는 사복 형사를 폭행했다는 이유로 구속됐다.

그 역시 맞았다. 하지만 그것은 변명이 되지 못했다. 집행유예 1년6개월을 선고받고 풀려났을 때 이미 계절은 여름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출소해 집으로 돌아온 날, 그는 중학생 아들과 고등학생 두 딸을 보며 망연자실하고 있을 틈조차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평생 기름밥만 먹고산 사람이 나와서 할 수 있는 것이 뭐가 있겠어요? 게다가 저는 집행유예 상태였으니 할 수 있는 것이 더 없었죠.”

가장 만만한 것이 다단계였다. 그러나 6개월 만에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손을 털고 나왔다. 다시 막막했다. 가진 돈도 없던 그가 할 수 있었던 일은 자장면 배달부였다.

아내가 받은 ‘노란 봉투’

“자장면 배달을 한 3년 하다 보니 욕심이 생기더라고요. 내 가게를 가져 봤으면 하는…. 그래서 치킨집을 냈다 또 쫄딱 망했죠. 그러면서 담보로 잡혔던 아파트도 경매로 넘어갔고….”

결국 그는 다시 자장면집을 찾았다. 복직 전화를 받던 날도 그는 자장면을 배달하고 있었다.

“동료들이 복직하고 있다는 소식은 간간이 들었어요. 기다렸죠. 언젠가 나도 불러 주겠지 하고….”

복 직 통지를 받던 날 그는 기뻐 날아갈 것 같았다. 첫 출근 전날에는 너무 기쁜 마음에 함께 복직된 동료와 밤을 새워 술을 마셨다. 5년 만에 처음으로 기쁨에 술잔을 기울인 날이다. 그날 그는 동료와 다짐했다. 아팠던 만큼 열심히, 후회 없이 일해 보자고.

그는 지금도 비바람 속에서 자장면을 배달하던 생각을 하면 머리카락이 곤두선다. 이 세상에 피눈물이 있다면, 그때 그 비바람 속에서 흘렸던 눈물이지 싶다. 그는 “가족이 없었으면 버티지 못했을 세월”이라고 말한다.

역 시 2001년 2월 정리해고됐다 지난해 5월 조립2부에 복직한 방종욱(44) 씨. 그는 “평생 할 인생공부를 지난 5년 동안 압축해서 한 셈 친다”고 말했다. 자식이 없어 다른 사람보다 처지가 나았지만, 그래도 노란 봉투를 받고 회사 문을 나서는데 막막한 것은 똑같았다.

처음에는 배운 것이 도둑질이라고 자동차 정비 일을 해볼까 했다. 그러나 자동차를 만드는 것과, 고치는 것은 또 달랐다. 그러던 차에 아는 동생이 소내장으로 만든 ‘막창’ 장사를 해 보지 않겠느냐고 권했다. 찬 밥 더운 밥 가릴 처지가 아니었던 그는 무작정 아내와 둘이 막창이 유명하다는 대구로 내려갔다.

두 달간 눈칫밥을 먹어가며 요리법을 배웠다. 그러고는 부천으로 올라와 있는 돈 없는 돈 다 털어 막창 가게를 차렸다.

▶지난해 5월 정리해고 5년1개월 만에 복직한 정병재(왼쪽), 방종욱(가운데), 이완기(오른쪽) 씨가 생산2공장에서 파이팅을 외치고 있다.


그 러나 가게는 생각처럼 굴러가지 않았다. 해고 후 한동안 인연을 끊고 지내던 회사 동료까지 찾아와 매상을 올려줬지만 제자리 걸음이었다. 그는 가게를 아내에게 맡기고 택시 기사로 거리로 나섰다. 세상에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지만, 택시 기사에게는 해당하지 않는 말이라는 것을 이내 깨달았다.

대우에 있었던 14년보다 택시를 운전한 2년 동안 세상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배웠다. 그는 한마디로 “인생공부 한번 징~하게 했다”고 말한다.

“옛 동료들로부터 회사가 해고자들을 복직시키고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말았죠. 먹고사는 데 바빠 신경 쓸 겨를이 없었어요. 아니, 그보다 나한테까지 차례가 올 것이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는 말이 옳겠네요.”

현 재 부평2공장에 근무하는 직원 1,800명 중 복직자는 600여 명. 이들은 모두 5년을 회사에서 버림받은 채 지냈지만, 그 정도로 짓밟히지는 않았다. 오히려 더 단단해져 돌아왔다. 작업장에서의 ‘손맛’도 여전하다. 부평공장 직원들은 지난 독일월드컵 한국-토고전이 열리던 날, 회사에서 응원전을 펼쳤다. 한국팀의 골이 터질 때마다 환호하며 짜릿함을 마음껏 즐겼다.

피눈물 5년, 더 단단해져 돌아와

“농성할 때 빼고는 동료와 모인 적이 없었어요. ‘전진대회’를 하던 ‘민주광장’에 함께 모여 월드컵 경기를 본다는 그 자체가 행복했습니다.”

“인근 아파트 주민이 우리를 내려다봤어요. 우리가 이렇게 살아났다고 마구 외치고 싶었죠.”

그날 복직자들은 2002년 월드컵 때를 생각하며 속으로 눈물을 훔쳤다. 대한민국 전역이 축제 분위기였던 당시에도 복직투쟁하느라 또는 생활전선에 떼밀려 하루하루를 술로 버티며 살아야 했던 이들이기 때문이다.

회 사는 복직자들을 신차를 생산하는 조립2공장에 배치했다. GM대우의 새로운 시작을 믿고 맡긴다는 의미라고 했다. 현재 부평공장은 주야 2교대 근무에 특근까지 더해 24시간 가동되고 있다. GM대우의 2002년, 2003년, 2005년 파업 시간은 0시간. 생산량은 GM대우가 출발했을 때의 약 4배인 150만 대에 이른다. 지난해 7월에는 파업 중이던 현대자동차를 제치고 판매실적 1위에 올라서기도 했다.

GM대우 측이 해고자에 대한 대량 복직을 계속한 것은 이들이 오랫동안 실직의 아픔을 겪어 애사심이 남달리 강하고, 또 노조 집행부가 파업 등 무리한 선택을 할 때도 이들은 조금이라도 회사의 입장을 이해하는 쪽에 서기 때문이다.

이 들에게는 더 이상 회사에 대한 미움은 남아 있지 않다. 물론 지난 5년을 생각하면 가슴 한쪽이 서럽고 아려 오지만 “우리도 고생이었지만, 남아 있던 사람은 더 고생했다”고 말할 수 있는 여유도 생겼다. 장씨는 “그래도 남은 사람이 열심히 해 줘 우리가 복직할 수 있었던 것 아니냐”고 말한다.

회사 분위기도 바뀌었다. GM대우 생산직의 90% 이상인 1만 명가량이 민주노총 금속산업연맹 소속이지만, 이제는 파업 집회가 있어도 간부 몇 명만 참석한다. 지난해에는 지도부가 파업을 결정했지만, 오히려 생산직 근로자들이 파업을 거부했다. 이들은 “더 높은 급여와 대우를 받고 싶다면 폭력을 써 가며 사측을 압박할 것이 아니라 열심히 일해서 회사를 발전시키면 된다”고 말한다.

그런 만큼 최근 성과급 차등지급을 둘러싸고 파업을 선언한 현대자동차 사태를 바라보는 이들의 마음은 복잡하다. 이들은 “동종 업종의 일이어서 뭐라고 말하기가 어렵다”고 말을 아끼면서도 “과거 우리의 길을 걷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말한다.

회사에도 문제가 있지만, 노동조합도 회사를 투쟁의 대상이 아니라 상생의 대상으로 바라봐야 한다는 것이다. 회사가 살아야 종업원도 산다는 것. 이들이 지난 5년간 뼈에 사무치게 배운 것이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과 거 대우차 노조는 회사의 경영상태 등은 고려하지도 않고 무조건 조합원의 이익만 추구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군중심리에 휩쓸려 파업이나 폭력시위에 동참한 경우도 많았죠. 그러나 결국 어떻게 됐습니까? 회사가 어려워지니 결국 모두 힘들어졌죠.”

장 병재 씨는 “지난 5년간 잃은 것이 너무 많다”고 말한다. 한 푼 두 푼 모아 장만했던 아파트도 실직 기간에 날렸다. 그나마 정리해고 후 사업에 실패해 몇억 원씩 빚을 진 동료에 비하면 나은 편이라고 위안 삼는다. 그는 지난 5년 동안 가족 중 아픈 사람이 한 명도 없었던 것에 감사한다.

이완기 씨 역시 “해고되고 처음에는 부부싸움도 참 많이 했지만, 결국 남는 것은 가족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실직 기간 그가 가장 힘들었던 것은 아이들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진 것을 봤을 때였다. 그는 복직해서 가장 기뻤던 일로 “아이들 대학 등록금을 보조받을 수 있게 된 것”을 꼽았다.

5년 전 고등학생이었던 큰아이가 벌써 대학생이 됐다. 그는 “그동안 아이들 학비가 큰 부담이었는데, 무엇보다 학비가 해결돼 요즘 두 발 뻗고 잔다”고 말한다.

방종욱 씨는 지난 5년간의 희망이자 애물단지였던 막창집을 곧 접을 생각이다. 그동안 고생한 아내를 편히 쉬게 해 주고 싶어서다.

“희망은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아가는 데 있다”

복 직해서 처음 맞는 새해. 이들은 하나같이 희망에 차 있었다. 한 치 앞이 안 보이는 낭떠러지에 서 있었던 지난해 이맘때와 비교하면 얼굴에서 자연스럽게 웃음꽃이 피어난다. 피눈물의 시련을 겪어낸 만큼 이들은 이제 두려울 것이 없다.

사회생활을 처음 시작하는 느낌이라는 이들을 두고 주변에서는 “의욕이 너무 넘쳐 사고 칠까 걱정”이라고 말한다. 그래도 다시 일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 또 더 나은 내일을 꿈꿀 수 있게 됐다는 사실에 하루하루가 즐겁기만 하다.

지난 5년 동안 각기 다른 지옥을 경험한 이들이지만, 이들의 깨달음은 한결같다. 희망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아가는 속에 있다는 것, 그리고 힘들 때 버팀목이 되는 것은 가족이라는 것이다.

이들의 남은 바람은 GM대우에서 정년퇴직하는 것이다. 이들의 정년까지 남은 기간은 짧게는 10년, 길게는 15년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회사가 잘돼야 한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다 행히 GM대우는 이들이 복직한 첫해였던 지난해 완성차와 KD수출을 포함해 총 139만7,487대를 수출하며 제너럴모터스(GM) 창립 이후 GM 그룹 내 한 회사가 기록한 연간 최고 수출실적을 달성했다. 또한 GM대우는 지난해 내수시장에서도 총 12만8,332대를 판매하며 비약적 성장세를 나타냈다.

오효림_월간중앙 기자 (hyol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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