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인사이드] 재벌2세들의 콤플렉스

중앙일보

입력

재벌 오너가(家) 사람들은 대개 화려한 삶을 살지만 그 이면에 남들이 모르는 어두운 고민이 있다. 대표적인 게 '물려 받는 자'로서의 중압감이다.

비범한 아버지, 할아버지를 둔 덕에 젊은 나이에 대기업 경영진에 합류하게 된 재벌 2, 3세. 이들은 예외없이 심한 부담에 시달린다. 교육 잘 받고 똑똑할수록, 정신이 제대로 박힌 인물일수록 그렇다. 운이 좋아 기업을 거저 먹는다는 식의 쑥덕거림에 상처 받는다. 뭔가 보여줘야 한다는 강박에 괴로워한다. 능력을 입증해 인정받기를 열망한다. 의연한 척 해도 속을 썩이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 후유증으로 일부 오너 경영자들은 지나치게 실적에 집착하기도 한다. 이미 '총수'로 안착한 3세 경영자 L회장은 후계자 시절 마음속의 경쟁기업과 지금까지도 끊임없이 '키재기'를 한다. 출발 당시 외형이 더 컸는데 지금은 역전된 상태. 그것에 대해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하니 참모들을 다그칠 수 밖에 없다. 영문 모르고 깨지던 한 월급쟁이 경영자는 최근에 와서야 회장의 해묵은 '콤플렉스'를 알게 된 후 머리를 끄덕였다고 한다.

'2세 콤플렉스'는 오너경영 기업에서 일어나는 복잡한 현상들에 대한 독해법으로도 유용하다. 그렇게 보면 최근 사면된 두산그룹 오너일가의 참을성 없는 경영복귀에 대해서도 조금은 너그러워 진다. 예상치 못한 가족 분쟁으로 박용성 전회장 형제들은 치명적인 마음의 상처를 입었다. 수십년간 자신들을 입증하며 쌓아올린 탑이 허무하게 무너져 버렸다. 사면으로 물리적인 족쇄가 풀렸으니 다시 보여주고, 인정받아야 한다는 조급증이 도질 수 밖에 없다. 남들이 뭐라 해도 당장 그렇게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것이다.

동아제약 강신호 회장 부자의 경영권 분쟁도 키워드는 비슷하다. 강문석(강회장의 차남)수석무역 대표는 경영능력 부족을 이유로 축출된 후 절치부심했고, 결국 동아제약 경영권 확보를 통해 자신을 보여주려 하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다수의 2세, 3세 후계자들이 비슷한 강박에 시달리고 있을 것이다. 승진 후 아직 목소리를 내지 않고 있는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 살얼음 밟듯 조심스러운 이재용 삼성전자 전무, 승승장구 하고 있는 효성그룹의 조현준 사장 3형제 등 처한 현실은 달라도 후계자로 등재된 이들의 속내는 본질적으로 큰 차이가 없다. 뭔가를 보여줘야 한다는 초조함을 적절히 조절하고 통제할 뿐이다.

그 중에서도 정의선 기아차 사장은 가장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다. 총수 후계자인 그는 2003년 현대모비스 부사장을 거쳐 2005년 기아차 사장으로 경영의 최전선에 일찌감치 투입됐다. 일이 잘 풀린 건 잠깐, 작년부터는 험로를 걷고 있다. 아버지인 정몽구회장이 구속-보석-유죄판결의 절차를 거치는 동안 마음고생이 적지 않았다. 기아차는 적자를 냈고 정사장이 승부를 건 해외사업도 낙관하기 이르다.

최근 그룹 임원인사를 앞두고 정사장이 전보될 것이라는 설이 돌기도 했다. 기아차 사장 자리가 후계자로서의 능력을 입증하기에 좋은 여건이 아니기 때문이다. 결국 보직 변경 없이 인사는 끝났지만 정사장도, 현대차그룹도 딜레마에 빠져있다. 뭔가 보여주긴 해야하는데 주변을 돌아보면 답답하기만 하다. 당사자가 느낄 무력감은 그보다 훨씬 클 것이다.

해법은 서두르지 않는 것이다. 모든 후계자들에게 콤플렉스는 '위험'인 동시에 '에너지'다. 에너지를 비축하는 시기로 삼아 자신을 다스리는 것이 첫번째다. 정사장이 서둘러 기아차에서 벗어나지 않은 건 사려깊은 인내로 평가받을 만 하다.

[머니투데이]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