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론

지식 선진국으로 가는 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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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이런 일들이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라는 점이다. 본지가 지난해 학술.연구.채용 전문포털과 공동으로 석.박사 305명을 설문조사한 결과 91%가 논문 부정을 체험하거나 목격했다고 한다. 심지어 교육인적자원부의 국책사업인 두뇌한국(BK)21 1단계 사업에 제출된 논문의 약 7%도 부정을 저질렀다는 것이다. 강도 높은 검증을 받는 교육부총리나 대학총장과 달리 일반 교수들 사이에는 아직도 연구 부정이 만연해 있다는 이야기다.

그렇다고 너무 자학할 일은 아니다. 미국 등 선진국에서도 연구 부정은 늘고 있다. 임기제 연구직과 응모형 연구비 지원이 늘고, 논문 건수 등 양적인 연구 평가주의가 확산된 것이 주요 원인이다. 실적을 쌓으려다 보니 연구 부정의 유혹에 쉽게 빠지는 것이다.

이에 맞서 구미 국가들은 1980년대 후반부터 연구 윤리를 강화하는 법적.제도적 장치를 마련했다. 미국은 92년 연구윤리국(ORI), 영국은 97년 논문발표윤리위원회를 각각 설치했다. 일본 문부과학성은 황우석 교수 파문에 충격받아 지난해 8월 대학 등에 연구 부정 고발 창구를 만들었다. 의혹 사건은 6개월 내에 결론 내리게 하고 연구 자료가 없으면 연구 부정으로 규정하는 등 초강경 대책을 마련했다. 연구 부정을 근절하려는 국가 간 협력도 확대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과학기술정책심의회는 지난해 논문 부정 대책 규칙을 정비하고 정보를 공유키로 했다.

우리 정부.학계가 지난해 황우석 교수 파동과 김 전 부총리 파문을 계기로 연구윤리 강화에 나선 것은 늦었지만 다행이다. 교육부.학계가 지난해 9월 만든 연구윤리 확립 추진위원회는 모든 대학에 올해 말까지 위반 기준, 조사 절차, 징계 내용을 구체적으로 담은 연구윤리 규정을 만들라고 요청했다. 내년부터는 그 결과를 연구비 지원 사업과 연계한다고 한다. 현재는 대학.학회의 19.5%만이 윤리 강령을 갖고 있다.

그러나 아직 선진국에 비해 크게 뒤떨어진다. 연구 윤리는 학자 양심, 대학.연구기관의 자정 노력, 정부의 감시 시스템이라는 3박자가 제대로 맞아야 향상된다. 특히 정부는 논문 데이터베이스(DB) 구축 등 연구 부정 제어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제보만 기다려선 안 된다. 가장 바람직한 것은 학계의 자율 정화인데, 학계의 뿌리 깊은 온정주의가 큰 병이다. 윤리규정이 있어도 제대로 조사하지 않는 학회, 교수의 연구부정이 확인됐는데도 유야무야 넘어가는 대학이 적지 않다. 하긴 논문 표절 문제로 물러난 김 전 교육부총리가 대통령 자문 정책기획위원장이 되고, 황우석 전 교수 논문에 별 기여 없이 공동저자가 됐던 박기영 순천대 교수가 정책기획위원이 되는 나라가 우리나라다. 청와대의 윤리의식이 이런 마당에 학계에만 강도 높은 연구윤리를 요구하는 것이 무리일지 모른다. 그래도 올해가 지식 선진국 원년이 되길 기대해 본다.

오대영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