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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감독들의 '뒷맛'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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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스포츠는 대단히 많은 종목을 거느린 분야다. 종목마다 특별함을 주장하고, 그 주장이 때로는 자존심의 격돌로 이어진다. 그렇기에 설령 친구라 해도 다른 종목에 종사한다면 자존심 경쟁을 피할 수 없다. 자신의 종목에서 더 큰 성취를 얻으려 할 뿐 아니라 어쩌다 술을 마셔도 지지 않으려 한다.

국가대표 선수와 감독을 거친 엘리트 축구감독 H씨와 농구감독 S씨. 두 사람이 만나면 초저녁부터 새벽까지 폭탄주로 시종한다. '나 한 잔, 너 한 잔…. 결국 누가 쓰러지나 보자', 이런 식이다. 하지만 헤어진 다음에는 뒤탈이 나 심심찮게 병원 신세를 진다.

스포츠맨들의 또 다른 공통점은 자신들의 종목이 놀랄 만큼 인생살이와 흡사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야구는 인생의 축소판'이라는 주장이 대표적이다. '위기 뒤에 찬스, 찬스 뒤에 위기'라는 격언은 거의 전 종목에 해당된다.

스포츠가 인생을 닮았다는 주장은 매우 설득력 있다. 이뿐만 아니라 아주 높은 수준에서부터 밑바닥에 이르기까지 인생의 모든 측면을 반영한 듯해 감탄하게 된다. 저급한 수준의 인생살이를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모습에 환멸을 느끼기도 한다. 그 환멸은 때로 특정 스포츠에 대한 혐오감으로 바뀐다.

한국에서는 야구.축구.농구.배구 등 프로 경기가 성행한다. 시즌이 끝나면 각 구단이 팀의 성적을 평가하고, 그 결과에 따라 감독 교체를 고려한다. 감독은 그 종목의 전문 종사자다. 그런데 넓게 보면 '동업자'들인 감독들이 오고 가며 남기는 뒷맛은 그리 사나이답지도, 스포츠맨답지도 못한 경우가 적잖다.

새 감독은 전임자의 무능력을 비난하고, 전임자는 후임자를 깎아내리기 일쑤다. 신임 감독은 흔히 "전임자가 팀을 너무 망쳐 놓아 수습하는 데만 몇 년 걸리게 생겼다"고 말한다. 전임자는 "이제 막 정비를 끝내 올라가는 일만 남았는데 후임자가 왔다"고 푸념한다. 후임자가 좋은 결과를 내면 "내가 다 만들어 놓은 팀을 가지고 낸 성적"이라고 평가절하한다.

전임자에 대한 공격은 자신의 능력에 대한 자신감의 표현일 것이다. 그리고 사회 모든 부문에서 사용되는 권력투쟁과 과거 청산의 한 방식이기도 하다. 앞에 예로 든 감독들의 말은 우리 사회 어느 분야에서든 흔히 듣는 말이다. 그러나 그것이 오직 과거만을 향해 던지는 올가미라면 앞으로 달리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과거의 돌기둥이 거꾸로 우리를 잡아당겨 앞으로 나갈 수 없게 한다.

과거의 외침은 언제나 고혹적이다. 하지만 그 외침이 현재를 사냥하려는 올가미라면, 신화 속의 영웅 오디세우스가 들은 마녀 사이렌의 노래와 다름없다. 사이렌의 노래에 취한 뱃사람들은 바위에 부딪혀 배와 목숨을 모두 잃었다. 그렇기에 오디세우스는 부하들이 노래를 듣지 못하도록 귓구멍을 밀랍으로 틀어막고 노를 젓게 했던 것이다.

인생을 닮았다는 스포츠의 격언 중에 잊지 못할 '작품'이 하나 있다. 권투 해설가 오일룡 선생의 "갈 길은 멀고 해는 저물고…"란 한탄. 불리한 경기를 한 우리 선수가 막판에 힘을 내지만 승산이 없을 때 이 말을 했다. 많이 쓰이는 어구지만 스포츠 해설에선 또 다른 맛이 났다. 우리 사회는 최근 몇 년간 노 젓기를 멈춘 채 자주 사이렌의 노래를 듣고, 때로 따라 불렀다. 그러는 새, 해가 저문 건 아닌지 걱정스럽다.

허진석 신매체본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