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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앵커맨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9면

앵커맨의 매끄러운 진행을 돕기 위한 것으로 프롬프터라는게 있다.
앵커용 방송원고 화상기쯤으로 해석하면 된다. 지금은 앵커가 카메라를 똑바로 쳐다보고 자막처리된 원고를 읽을수 있도록 발전되어 있지만 70년대초에는 웃지못할 일이 비일비재했다.
당시 MBC보도국장 Q씨는 『뉴스데스크』의 진행을 맡고는 싶은데 그렇다고 일일이 밑을 보며 원고를 읽기는 싫고해서 묘안을 짜냈다.
별도의 방송원고를 나무막대기에 말아 손잡이를 연결한 특수기구를 카메라 바로 밑에 설치해 다른 사람이 적당한 속도로 돌리면 따라 읽는 방법이었다.
글씨를 잘 쓰는 기자는 바깥 취재를 마치고 돌아와도 매양 이같은 가욋일이 안겨지는 통에 숨어다니느라 바빴던 시절이기도 했다.
입사한지 얼마안된 K기자는 이일을 맡게되자 매일 취재하느라 돌아다니며 파김치된 몸에 저녁때마다 손잡이를 돌리는게 힘도 들어 상사인 Q씨를 골탕먹일 요량으로 심술(?)을 부렸다.
손잡이를 천천히 돌렸다가, 멈췄다가, 빨리 돌렸다가 하는 바람에 원고를 읽어내려가던 Q씨가 크게 당황, 사색이 다 됐다.

<자막보면서 진행>
초창기 시절의 분위기를 그대로 보여준 한 예다.
미디어의 총아로 불리는 앵커맨의 시조로는 미국CBS의 월터 크론카이트가 꼽힌다.
1952년 여름, 미국대통령선거를 위한 전당대회 실황취재는 미국내 3대TV네트워크의 인기순위를 판가름짓는 중요한 계기였다.
CBS보도국장 시그 미켈슨은 전당대회중계의 붙박이 진행자로 무명의 크론카이트를 전격 발탁했다.
TV뉴스진행의 전담자로서 앵커맨이라는 신조어가 탄생한 순간이었다.
미켈슨은 전당대회를 전국에 생중계하려면 뉴스 현장의 조직과 취재를 진두지휘할 인물이 한복판에 오랜시간 버팀목으로 자리잡아야한다고 믿었다.
그리고 역할을 담당할 뉴스진행자를 배의 동요를 잡아매는 닻(anchor)에 비유해 앵커맨이라고 명명했다.
이같은 앵커맨제도는 이후 유럽과 일본등지에 영향을 미쳤고 한참 지나 국내에도 여파가 미쳤다.
다만 국내에서의 앵커제는 그 도입시기와 운영방법등이 무 자르듯 명쾌하게 설명되기 어려워 앵커사 정리를 힘들게 하고있다.
앵커제의 본산지인 미국의 경우 시청률이 가장 높은 저녁뉴스시간대에 얼굴을 내미는 NBC의 톰 브로커, ABC의 피터 제닝스, CBS의 댄 래더등을 앵커로 인정하고 있다.
또 앵커는 독립된 제작체계를 갖춰 앵커맨이 직접 기획·제작에 참여하고 출연할수 있는 재량권을 갖고 있다. 국내에서는 언제, 누가 그같은 개념의 앵커역할을 시작했는지 논란의 여지가 있다.
앵커제를 국내에서 처음으로 「흉내낸」것은 지난 70년10월.
MBC가 뉴스프로그램인『뉴스데스크』의 진행방식을 아나운서 중심에서 뉴스진행자를 축으로 취재기자들이 직접 등장하는 체계로 완전히 바꾼것이 그 시초로 알려지고 있다. 이름하여 「뉴스캐스터」제도다.
본격적인 앵커맨제도와는 거리가 멀었지만 아나운서가 주어진 원고를 있는대로 읽던 종래 방법과는 색다르게 진행되는 모습이 당시로선 꽤나 눈길을 모았던 셈이다.
당시 보도국장인 박근숙씨(현방송기자클럽회장)가 선두타자로 뉴스진행의 마이크를 잡았고 뒤이어 보도국부국장을 맡고있던 김기주씨(전제주MBC사장)가 바통을 이어받았다.
진행은 그런대로 넘어갔으나 초창기다보니 방송화면사고가 종종 일어나 무척 애를 태우기도 했던 때다.
동시녹음이 안됐던 시절이라 화면에서 현장 취재기자의 입은 계속 움직이는데 말소리는 들리지 않고 뒤늦게 음성이 나온다해도 입과 말소리가 따로 노는 바람에 뉴스진행자가 냉가슴을 앓곤했다.
사건·사고 취재현장에서 직접 보도하던 기자들이 한때 TV출연을 거부하는 일이 잇따라 뉴스진행자등 보도국간부들과 한동안 티격태격했던적도 있다.
흑백TV임에도 화재현장등에서 뛰다보니 형편없는 몰골로 변해버린 기자들의 모습을 보고 놀란 가족들의 압력이 거셌기 때문이다.
뉴스진행자로 기자를 기용하기로는 KBS가 첫번째라는 주장도 있으나 실제 순서는 MBC에 이어 TBC·KBS라는 견해가 많다.
특히 KBS는 당시 이광재씨등 중진급 아나운서들이 이같은 지각변동을 아나운서고유영역의 침범으로 여겨 크게 반발, 진통끝에 70년 가을『아침뉴스』와 1년후 저녁『9시뉴스』에 기자들이 제자리를 잡는데 힘이 들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70년대 KBS의 기자출신뉴스진행자는 박성범씨(현『9시뉴스』앵커), 이인원씨(현『심야토론』 진행자), 김학영씨(현 KBS시설관리사업단사장)등 3∼4명으로 번갈아 가며 진행을 맡았다.
70년대 중·하반기 뉴스진행자중 TBC논평위원이었던 봉두완씨(전국회의원)는 독특한 진행솜씨로 세인의 관심을 끌어모은 것으로 유명하다.
라디오 『뉴스전망대』와 TV시사프로 『동서남북』에 이은 『9시뉴스』 진행을 맡아 다소 어눌한 듯한 어투에 정곡을 찌르는 내용을 담아 당시 시대의 우울함을 달래주었다는 평을 받고 있다.
국내에 본격적인 앵커맨시대가 도래한것은 81년.
70년대가 많은 뉴스진행자가 명멸해 춘주전국시대를 방불케하는 뉴스캐스터 시대였다면 컬러TV가 선보인 81년을 기점으로 80년대는 뉴스앵커맨이 나름의 기반을 다져간 시대였다고 볼수 있다.
81년 이전의 뉴스진행은 명색이 앵커라 해도 여러사람이 돌아가며 진행을 맡아 단순한 뉴스전달 측면이 컸던 반면 저년 중반께부터는 취재지시와 뉴스선택·편집등의 기능이 어느정도 주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때 빛을 본 앵커맨이 MBC의 이득례씨(현보도이사)와 KBS의 최동호씨.
이씨는 차분한 진행으로, 최씨는 속도감 있는 진행으로 9시뉴스프로그램의 쌍벽을 이뤘다.
70년대 중반부터 하순봉씨등과 함께 뉴스프로그램을 진행해오다 81년6월 『뉴스데스크』의 고정앵커맨으로 뽑힌 이씨는 특히 만 6년간 장수를 누린 베테랑으로 평가받고 있다.
친근한 인상과 부드러운 화술로 신뢰감을 주었던 이씨가 고정앵커로 선정된 이면에는 실력 못지 않은 운이 따랐던. 것으로 보인다.
이진희사장이 미국 방송계를 둘러본뒤 『앵커는 혼자 하는게 좋겠다』는 의향을 비친뒤로 이씨등 3명이 경합끝에 최종 낙점되는 과정을 밟았기 때문이다. 시운이 따라야 한다는 얘기와도 통한다.
하순봉씨는 5공 출범후 청와대 출입때 전두환 전대통령과의 인연을 바탕으로 민정당 소속 국회의원으로 정계에 진출하기도 했다.
지난해초 앵커 재등용설이 나돌기도 했으나 결국 보도책임자로 자리잡은 이득렬씨등 역대 앵커를 통해 본 선발절차는 시청률 경쟁만큼이나 까다롭다.
외부입김이 먹히지 않는 것은 물론 사장의 의견도 그리 대단한 영향력을 미치지않는다는 뒷얘기가 있다.
시청률 경쟁에서의 우위확보가 지상과제인 방송사의 생리상 앵커맨을 잘못 선택한데 따른 책임을 지고 싶어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는 시각이 설득력을 갖는다.
앵커 물망에 오른 사람들의 뉴스진행 장면을 비디오로 촬영한 것을 놓고 토론을 거쳐 결정하는데 결정이 수월치 않을때 투표까지 가기도한다. 뉴스전달능력 못지않게 개인의 이미지도 중요하기 때문에 인선이 어렵다.
86년이후 양 방송사의 앵커기용은 큰 대조를 이뤄왔다.
KBS는 86년11월이후 현재까지 『9시뉴스』의 앵커자리를 박성범씨가 굳세게 지켜온 반면 MBC는 87년6월 이득렬씨가 물러난후 강성구(현마산MBC사장)·송도균(현북한부장)·추성춘(현해설주간)씨 등에 이어 89년 들어선 엄기영씨에 이르기까지 2년사이에 6번이나 앵커가 바꿔는 양상을 보여주었다.
지난5월 신설된 『MBC뉴스센터』(일요일 오후9시)의 진행은 이상열씨가 맡고있다.

<선발절차까다로워>
이중 추성춘씨는 어려운 내용을 쉽게 풀어 전달하는 능력이 있다는 평을 받았으며 지금도 해설주간으로 시사뉴스해설의 중추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그러나 추씨가 앵커자리를 내놓을때 건강상의 이유를 내세웠듯 겉보기에 화려한 앵커의 생활이 기실 상당한 압박의 연속임은 알만한 사람은 다 안다.
한 앵커는 인기세의 속절없음을 얘기하기도 한다. 세금이란게 수입이 있어야 내는 건데 인기세는 수입은 하나 없이 비싼 대가만 치르는 격이라며 흔한 말로 「사람잡는세금」이라고 농을 건넨다.
미국처럼 몇년간 고액의 연봉과 뉴스편집장의 지위를 부여하여 개인의 사생활 희생을 벌충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차츰 주변여건을 개선할 필요는 있다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술을 좋아한다해도 워낙 격무라 마음놓고 술로 스트레스를 풀기도 어렵고 조금만 이상한 자리에 나타나도 구설수에 오르기 십상인 앵커들은 대부분 시계추처럼 집에서 회사를 왔다갔다하는등유명인치곤 비싼 유명세를 치른다며 한숨(?)을 짓는 이도 있다.
앵커가 얼마나 인기인인가하는 것은 진행프로의 광고수입이 앵커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에서도 알수 있다.
MBC 『뉴스데스크』의 한해 광고수입도 앵커의 비중과 무관치 않다고 한다.
지난해 『뉴스데스크』의 연간 광고수입은 2백75억원으로 MBC 총 광고수입인 3천1백80억원중 상당액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여타뉴스프로와 다른 저녁뉴스시간대의 앵커비중을 가늠케 하는 자료이기도 하다.
12월 개국예정인 SBS역시 앵커의 비중을·감안, 사내외 인사를 물색중이나 최근 여러측면을 종합검토한 끝에 사내인사인 40대의 M, Y씨중 한명을 9월중으로 최종 선발한다는 방침이다.

<인물따라광고차이>
앵커를 들먹일때 빼놓을수 없는 부분이 여성앵커.
한국식 영어인 앵커우먼이란 이름으로 많은 이들이 거론되긴 하나 굳이 앵커로 꼽을수 있는 사람은 신은경씨정도.
이밖에 MBC 『뉴스 데스크』의 백지연씨와 박영선씨, KBS『9시뉴스』의 이규원씨등이 가능성을 인정 받고있다.
미국에서도 주요 저녁시간대의 뉴스진행 책임자만 앵커로 보고 있고, 국내 여건을 감안하더라도 그간 앵커칭호가 남발돼 왔다는 지적이 있다.
적지않은 여성들이 ABC를 통해 미국을 휘어잡았던 바버러 월터스를 꿈꾸며 하나의 장식품이길 거부해 왔으나 투철한 직업의식 부족등으로 도중하차한 경우가 의외로 많다.
세인의 관심중 앵커의 분장·의상에 대한 호기심은 꽤 높다.
박성범씨의 경우 양복 30∼40벌, 넥타이 1백개를 갖고있고 짬짬이 구입한 이들 양복과 넥타이를 조화시켜 입는데 신경을 쓰는 편이다.
감각도 좋다는 평을 듣는다. 드라마부문의 분장사가 와 뉴스진행전 간단한 분장을 해준다. 여성들은 자신이 직접 분장한다.
여성들은 또 거의 매일 바뀌는 의상을 월급으로 감당키 어려워 단골의상실 신세도 지고 있는데 의상실에서는 인기인이 입기때문에 자기제품의 이미지를 높일수있다는 계산으로 협조한다는 얘기다.
방송사의 앵커에 대한 금전적 지원은 그리 많지않다. KBS는 분장비 명목으로 하루2만3천∼1만3천원을, MBC는 분장·조사비조로 매일 2만6천∼1만6천원을 지급한다.
뉴스진행을 위한 지원팀은 KBS의 경우 기자직인 뉴스PD와 분장사 1명을 포함, 10여명으로 일본 NHK의 『NC9』의 92명, 미국의 60여명수준에는 크게 못미치고 있다. <김기평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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