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저의 공습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1면

중국 상하이(上海) 푸둥(浦東) 지구에 있는 할인점 까르푸 매장. '1만 위안(약 120만원)'의 가격표가 붙은 일본 샤프의 40인치 LCD-TV 진열대 앞에 8일 중국 소비자들이 몰려 구경하고 있었다. 국내 대형 가전할인점에서 150만~200만원에 팔리는 한국산 대기업 제품의 60~80% 가격이다. 이 매장 관계자는 "삼성전자나 LG전자 제품은 비싸 우리 매장에 들여놓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 매장에선 일본 샤프 제품과 값싼 중국산만 팔고 있었다.

일본 마쓰시타(松下) 전기는 지난해 말 미국의 가전 유통점 베스트바이에서 42인치짜리 PDP-TV를 999달러(약 94만원)에 팔기 시작했다. 1500달러 이상을 받았던 제품을 30% 이상 싸게 판 것이다. 마쓰시타는 행사가 끝난 뒤에도 1200달러 정도로 가격을 정했다. 삼성전자 등은 미국 시장에서 비슷한 제품을 1200~1500달러에 팔고 있다.

일본 기업들이 '품질과 브랜드 가치로 승부를 겨루는 고가 제품'이란 이미지를 벗어던졌다. 최근 2년 동안 20%가량(대 미 달러환율 기준) 떨어진 '엔저'현상을 무기로 전자제품 등을 싼값에 팔고 있다. 한국에 잠식당한 시장을 탈환하는 것이 목표다.

특히 거대 시장으로 성장할 중국.인도 등에선 값을 확 내렸다. MP3폰 등으로 프리미엄 휴대전화 시장에 돌풍을 일으켰던 소니에릭슨은 인도 시장을 겨냥해 올 상반기에 값싼 휴대전화를 내놓겠다고 밝혔다.

도요타자동차도 올해 초 대당 500만원대의 초저가 자동차를 내놓겠다고 선언했다. 저가품 공세로 일본 업체들의 신흥시장 점유율도 오르고 있다. 소니의 중국 LCD-TV 시장 점유율은 2005년 4.1%에서 지난해 8.0%로 올랐다.

<표 참조>

일본 기업들은 브릭스(BRICs:브라질.러시아.인도.중국) 등 신흥시장에서 '현지 생산, 현지 판매' 전략을 펴고 있다. 생산비를 아끼고, '수입품이 아니라 현지 기업이 만든 제품'이라는 이미지를 심어 시장을 파고들겠다는 것이다. 마쓰시타는 중국.러시아.브라질에 PDP.LCD-TV 생산 시설을 만들었다. 히타치는 태국을 동남아 생산 거점으로 결정했다. 태국과 인도는 자유무역협정(FTA)이 체결돼 있어 제품을 인도에 수출할 때 관세를 거의 물지 않기 때문이다. '엔저 공습'에 한국 업체는 고전하고 있다.

국내 전자업계 관계자는 "중국에선 어느 정도 시장을 지키고 있으나 러시아 등에서는 판매량이 줄고 있다"고 말했다. LG경제연구원 박천규 연구위원은 "우리 기업들은 차별화된 디자인 등으로 제값을 받는 '프리미엄 제품' 이미지를 꾸준히 심는 한편 신흥시장을 겨냥한 저가 제품 개발에도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상하이=권혁주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