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ERIReport] 국민이 원하는 대통령 업적은 따로 있는데 …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경제 06면

누구든 무언가 '이건 내가 이뤘다'는 걸 남기고 싶어한다. 개인이면 자식들에게 많은 재산이나 큰 명예를, 사장이면 자기가 일궈낸 기업에 탄탄한 사업기반을 남기고자 한다. 또 장관이면 산하 단체를 만들거나 부처 일을 늘려 공무원들이 펜대를 놀리며 위세할 일을 많이 만들고 싶어한다. 보통 사람들조차 이럴진대 하물며 대통령은 오죽하겠나.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고속도로를 놓았다거나 고속철도를 깔았다는 등 후대가 두고두고 얘기할 거리를 재임 중에 마련해 놓고 싶어 하게 된다. 대통령에게도 '기념물(monument)'로 부를 만한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권력이 막강하면 기념물 또한 어마어마하다. 기념물에 대한 권력자의 집착은 전제(專制)가 심할수록 더 강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베르사유 궁전이나 성베드로 성당을 둘러볼 때 "당시 권력이 어땠기에 이런 걸 다 지을 수 있었을까"하는 생각이 절로 드는 것이다.

권력자 중에는 만리장성 같은 기념물을 지을 생각을 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민생을 생각해서다. 그런 경우에는, 그 주변 사람이라도 나서서 기념물을 만들라고 바람을 넣기 십상이다. 진정으로 나라와 국민을 위해서나 정 그게 아니면 권력자 개인을 위해서가 아니다. 자신의 영달을 위해서다. 기념물 만드는 일이 성사되면 당장 떡고물이나 출세를 챙길 수 있고, 설사 일이 성사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대통령이 된 사람에게 '저 사람은 좀 엉뚱하긴 해도, 나를 굉장한 인물로 생각하는구나'하는 인상이라도 남겨 훗날의 영달을 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권력자나 그 주변이 기념물 얘기를 쉽게 꺼내는 이유는 단 한 가지다. 자기 두 손으로 짓는 게 아니고 자기 돈이 들어가지 않기 때문이다. 국민으로부터 짜낸 혈세로 벌일 일이기 때문에, 자기가 부담하는 돈이 아니기 때문에, '각하께서는 후대를 위해 이런 이런 큰 사업을 벌여야 합니다'라고 간언(奸言)하는 것이다.

민주화된 나라일수록, 또 민생을 걱정하는 지도자일수록 엄청난 돈이 들어가는 고속도로나 신행정수도 같은 '하드웨어' 기념물보다는 돈이 들지 않는 제도개혁 같은 '소프트웨어'기념물을 마련하려고 애쓴다. 우리나라도 한때는 그랬다. 문민정부는 문민화와 금융실명제를 남겼고, 국민의 정부는 남북정상회담을 남겼다.

그러던 우리나라에 막대한 혈세가 들어가는 하드웨어 기념물이 다시 등장하고 있다. 우리 시계는 거꾸로 돌아가는 모양이다. 대통령이 수십조원을 들여 행정수도를 새로 만들겠다고 하니까, 다음 대통령이 되겠다고 나서는 사람들은 얼마가 들어갈지도 모르는 채 한반도를 꿰뚫는 운하나 중국과 연결하는 페리인가를 놓겠다고 나선다. 그 주변에 땅을 가진 사람이나 기념물을 지을 업자들의 귀에는 솔깃할지 모른다. 그러나, 부지매입과 건설공사에 들어갈 세금을 부담해야 하는 일반 국민의 입장에서는 여간 걱정이 아니다.

20세기까지가 하드웨어의 세상이었다면, 21세기부터는 소프트웨어의 세상이다. 대통령의 기념물도 하드웨어로부터 소프트웨어로 바뀌어야 한다는 얘기다. 정작 우리 국민이 원하고 나라에 필요한 것은 소프트웨어 기념물이다. 그중에서 제일 아쉽고 절실한 게 개인이나 기업들을 자유롭게 하는 규제 개혁이다. 돈도 들지 않으면서 국민을 편안하게 하고 기업과 나라를 살찌우는 게 이런 기념물이다. 제발 다음 대통령은 규제개혁이라는 소프트웨어 기념물을 남겼으면 한다. 그래서 연년세세 그의 자손과 국민이 그 대통령을 두고 '돈 들이지 않고 나라를 편안하게 하고 잘살게 만든 사람'이라고 칭송할 수 있었으면 한다.

김정수 경제전문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