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허 현진건 부암동 고택 헐렸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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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빙허 현진건(1900~43)이 역사소설 '무영탑' '흑치상지' 등을 집필한 서울 종로구 부암동 고택이 지난 14일 헐린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 앞서 지난 9월 서울 홍제동에 남아있던 역사 소설가 고 유주현(1921~82)의 집도 헐려 지금 아파트 공사 작업이 진행 중이다.

한국문화유산정책연구소 황평우 소장은 27일 "종로구청의 관심 하에 서울시가 보존 문제를 본격 논의하는 과정에서 빙허의 집이 헐렸음을 확인하고 허탈감을 떨치기 어려웠다"고 전했다. 행정 구역상 부암동 325의 2에 해당하는 이 집은 빙허가 1936년 일장기 말소 사건에 연류돼 1년간 옥고를 치른 뒤 닭을 치며 글을 썼다는 곳.

이 지역을 관할하는 종로구청은 "정식으로 멸실 신고하고 철거해 법적으로 하자가 없다"며 "문화재 지정이 안돼있어 보호할 방법이 없었다"고 밝혔다. 앞서 종로구청은 서울시에 여러차례 이 집을 지방문화재로 지정해줄 것을 요청했으나 재정 확보 문제로 실행을 미뤄왔다. 대신 '현진건 집터'라는 표석만 설치한 상태에서 간간이 집 소유주와 가격 문제를 협의했다.

이로써 빙허의 삶을 기록한 흔적은 사실상 모두 사라졌다. 고인의 유해가 뿌려졌다는 경기도 시흥군 신동면 서초리(지금의 서울 서초구 일대), 소설 '빈처'를 썼다는 서울 관훈동 고택, 생가인 현 대구매일신문사 부근 등은 모두 자취가 없어진 지 오래다. 그나마 부암동 집만이 유일하게 남아 있던 빙허의 흔적이었다.

당초 재정확보에 어려움을 겪던 서울시는 최근 약 2백억원의 재원을 만들어 문화예술적 의미가 강한 근대 건축물을 사들이고 시 문화재로 지정.보존하는 방법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소설가이면서 서울문예인유적보존회 대표를 맡고 있는 오인문씨는 "올들어서만 최남선.유주현의 고택에 이어 이번 현진건의 집도 철거됐다"면서 여러 건축물들의 현 소유주가 그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한 멸실은 계속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해방 공간에서 활동했던 문인들의 흔적을 지키는 일이 다급함을 일러주는 대목이어서 서울시의 대응이 주목된다.

황평우 소장은 "일정 기간(대략 50년)이 지난 건축물을 철거할 경우에는 허가를 받도록 하고 어길 경우 벌칙을 강화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홍수현 기자

<사진설명전문>
현진건이 소설을 집필하던 종로구 부암동 집의 헐리기 전(上)과 헐린 후 모습. 집이 헐리고 빈 집터 뒤편에 세종의 3남 안평대군이 살았던 무계정사 유적이 보인다. 풍수전문가들은 이곳을 서울의 3대 명당 중 하나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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