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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바로잡은 소 민군 신뢰/박준영 뉴욕특파원(취재일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2면

소련 강경보수세력의 쿠데타 실패는 소련국민들의 힘과 옐친의 용기가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러나 그같은 힘과 용기도 만약 소련군이 무자비한 잔인함을 발휘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소름 끼치는 사태가 벌어졌고 소련역사는 거꾸로 돌아가고 있을 것이다.
위기가 발생한 후 거의 24시간 현장중계를 한 미국 텔리비전의 채널을 돌려가며 러시아공화국 청사앞에 인의 방벽을 구축한 모스크바 시민들과 청사점령을 명령받고 출동한 탱크부대의 대치에 유독 관심을 가졌던 것은 이 대치가 사태의 향방을 결정할 것이란 기자적인 판단뿐 아니라 민군관계에서 불행한 경험을 여러번 한 우리역사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무엇을 하러 왔느냐. 우리에게 어떤 적을 찾으러 왔느냐. 너희들은 우리아들이다. 돌아가라』고 애타게 호소하는 구부정한 60대할머니,장갑차위의 병사를 불러 『왜 국경에 있지않고 이곳에 와 있느냐』며 호통을 치는 중년신사들,혹은 장갑차 위에 올라가 군인들의머리를 쥐어박으며 돌아가라는 손짓을 계속하는 청년들의 모습이 있었다.
이같은 시민들의 성화에 탱크에서 내려와 모자를 벗고 출동이유를 설명하는듯한 누런제복이 있는가 하면탱크위로 내민 얼굴을 숙이고 침묵을 지키는 병사의 모습도 보였다.
이런 모습가운데 압권은 옐친대통령이 청사점령명령을 받고 나온 탱크부대병사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눈후 한 탱크위에 올라가 시민들에게 쿠데타세력에 저항하라는 메시지를 읽고 한 병사가 옐친의 발밑에서 얼굴을 손에 묻고 쭈그리고 앉아있는 모습이다.
이같은 모습은 일찍이 자국민을 적으로 대하지 않고 자신을 그 일부로 생각하는 소련군의 전통과 군인들도 남이 아닌 바로 자기의 아들이라는 국민들의 군에 대한 신뢰와 믿음 때문으로 지적되며 쿠데타 실패 가능성을 제기시켰다.
이같은 성숙한 국민과 군이 있기 때문에 소련은 이번 위기에도 불구하고 세계인들에게 긍지를 가질만 하고 앞으로 또다른 역사의 후퇴는 없을 것이란 생각을 갖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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