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문학통사 정리작업에 착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1면

연민 이가원 씨(74)는 우리 나라에서 유자로서는 마지막 세대에 속하는 인물이다. 그를 낳은 안동 인근에서는 그릇이 큰 한 유자로 대접받는다. 지금도 향리의 고샅에서 그를 만나면 넙죽 흙바닥에 엎드려 큰절로 문후하는 젊은이들이 있다고 한다. 믿긴 어렵지만 얼마전 자기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는 사람의 이야기다.
성균관대학교 담장 옆에 자리잡은 그의 2층집에는 지당이라 새긴 현액이 하나 걸려있다. 지당이란 더디고 더디게 자라되 그 청정한 푸르름을 잃지 않는 소나무를 두고 지은 그의 당호의 하나다. 책을 읽다가도 아름다운 문자를 만나면 곧 이를 취해다 당호로 삼곤 하는 버릇 덕에 그는 추사 김정희 이래로 가장 많은 가진 사람이 됐다.
1백 개를 넘는 아호 중에서 그가 제일 마음에 들어하는 게 연민이다. 「깊숙히 숨어사는 백성」이란 뜻인데 하긴 그의 사는 모습이 꼭 그렇다. 평생 명리를 손사래치며 끊고 지내왔기에 그에게는 갖춰놓은 것이 없다. 드러내지 않는 성정 탓이겠지만 그나마 대학강단을 떠난 뒤로는 그는 아호 뜻 그대로 세상마저 잊은 숨은 백성이 돼버렸다.
「매화서옥」이란 이름이 붙어있는 그의 서너 평 남짓한 서실은 몇백 권외 서책이 꽂힌 서가에 안두를 마주한 그의 부요한 몸집 하나만으로도 방안이 꽉 차는 비좁은 공간이다. 『처음엔 이 옆에 자벽관이란 9평 짜리 집을 지니고 살았는데 79년인가 서예전을 해서 마련한 돈 2천만 원으로 건평 33평의 이 이층집을 달아지었어요.
이 집을 지으면서 자벽관을 헐 작정이었는데 돌아가신 월탄 박종화 선생께서 20∼30책이나역저가 꾸려져 나온 산실을 그냥 허물어버릴 수 있느냐며 적극 말리시는 바람에 그냥 두기로 했지요.』
그때 그는 지당이란 당호를 단 이 2층집 아래채 한 옆을 빌려 서실을 꾸미고 그 비좁은 공간 속에서 10년 남짓만에 세상에 저서 1백 책을 펴내는 초인적 업적을 냈다.
그가 23년 동안 몸담고 있던 연세대를 정년퇴임 한 것은 82년 8월. 그로써 찾은 한유의 시간을 조용히 학문을 닦고 궁구하는 데 써야겠다고 스스로 다짐도 했으나 흠모하는 제자· 후학들의 성화에 그도 뜻 같지 않다는 푸념이다.
『88년 봄부터 제자 70여 명이 나를 강장으로 삼아 고전강독을 정례화하기로 하고 「열상고전연구회」란 모임을 만들었어요.
매주 토요일 오전에 독회를 갖고 있는데 거기서 나온 이야기와 토론내용들을 정리해 책을 내고 있지요. 「열상고전연구」란 논문집이 4집 째 나왔고 독회 중 녹음했던 것을 풀어 최근엔 「시경신역」이란 단행본도 출간했어요.』
열상고전연구회 말고도 연민의 학문을 따르는 제자들 2백여 명이 경연회란 모임을 만들어 근 2O년을 꾸려오고 있다.
최근엔 이 모임을 발전적으로 해체, 「연민학회」로 이름을 바꾸고 사단법인 인가신청을 내놓았다. 이 학회는 한국·대만·일본·중국 등으로 규모와 활동을 국제화하는 한편 학술대회·학술상 등을 마련해 그의 학문을 기릴 계획이다.
그는 대단한 수집벽을 지닌 선비로 평생 걸려 모은 서책·서화·골동이 3만여 점에 이른다. 2층 전체를 빼곡히 채우고있던 서책 2만여 권, 골동 및 서화 1만여 점을 그는 지난 87년 아무 조건 없이 몽땅 단국대에 기증했다.
여기엔 『열하일기』원본을 비롯한 각종 문집과 추계견묵첩·추사인장·겸재산수병풍 등 문화재급의 귀중한 자료들이 포함돼 있다. 당시의 값으로 쳐도 수백 억 원대는 족히 넘길 이 서책골동·서화들을 그는 모두 가난한 선비의 주머니를 털어 사 모았다. 아내인 손진태 씨(72)가 밥 끓일 쌀이 없다고 투정하면 「죽을 쑤라」고 이르고는 숨겨둔 몇 푼 돈을 싸쥐고 고서점이나 골동품점으로 내닫곤 했다.
그가 기증한 소장품들은 현재 단국대 도서관에 보관돼 있는데 학교측이 이 아름다운 선비의 마음씨에 보답할 양으로 천안분교 옆에 짓고있는 연민기념도서관으로 곧 옮겨져 영구보존될 것이라고 한다. 연민기념도서관은 대지 1천 평에 건평만 5백∼6백 평되는 현대식 건물. 내부공사는 거의 다 끝냈고 현재 외관을 다듬는 작업이 한창이다.
건강은 괜찮은 편으로 온종일 책을 읽고 집필을 해도 아직은 크게 무리를 느끼지 않는다. 86년 정음사에서 22권으로 된 『이가원전집』을 펴내 그 호한한 학문적 저력을 과시했던 그는 그후로도 해마다 저서를 보태 지금은 전집권수가 모두 28집에 이르렀다. 그는 지난 한해에만 『벽매만과』 『유연당집』『삼국견사신역』 등 3권의 저서를 출간, 마르지않는 학문에의 열정을 보여 주었다.
1917년 경북 안동에서 퇴계의 14대손으로 태어난 연민 이가원 씨는 고집스런 조부·부친 밑에서 신학문에 접할 기회를 갖지 못한 채 23세까지 한문만 읽다가 1940년을 전후해 서울로 올라왔다.
명륜전문학원 연구과 3년 과정을 졸업한 뒤 해방과 함께 성균관대 국문과에 편입, 공부를 계속한 그는 거기서 석·박사과정을 거쳐 성대 국문과 석사1호·박사1호의 기록을 남기고 모교 전임교수가 됐다. 그의 박사학위논문인 『연암소설연구』는 해방이후 10대 저술의 하나로 꼽히는 역저다.
연대로 자리를 옮긴 것은 1959년. 김창숙 옹과 함께 자유당정권의 부정에 항거하다가 성대에서 파면 당해 떠도는 그를 백낙준 박사가 데려간 것인데 82년 정년퇴임 할 때까지 거기서23년간을 붙박혀 지냈다.
그 동안 펴낸 1백여 책의 저서와 수백 편의 논문으로도 모자라 『이제 우리 국문학의 통사를 훑어 정리하는 작업을 시작했다』며 그는 웃는다.
『자료는 다 모아놓았으니 쓸 일만 남은 셈이지요. 아직은 그럴 힘이 있어요.』 <정교용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