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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적 과소비」이대론 안된다/이은윤(중앙칼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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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우리사회는 지금 이상한 병을 앓고 있다. 전혀 새로운 병이라 아직 확실한 병명도 없다. 굳이 병명을 붙여 본다면 「절망적 과소비병」이라고나 할까.
여기에다 오래전부터 만연돼온 일부 부유층의 호화혼수·고급 외제품 사용등과 같은 「과시적 소비」까지 겹쳐 과소비 망국론이 떠들썩하다.
그뿐만이 아니다. 과소비라는 도깨비는 중산층의 해외관광이나 보통사람들의 먹고 입고 노는 일상생활속에까지도 나타나 전래의 우리네 미풍이던 근검절약정신을 망치고 있다. 이제 부자나 보통사람을 가릴 것 없이 마치 「내일은 없다」는 듯이 쓰고 놀자는 소비열병을 앓고 있는 모습이다.
○실종된 근검절약 정신
한국농촌경제연구소가 최근 내놓은 「89년도 식품수급표」는 국민 1인당 하루 평균 영양공급량이 필요량 보다 2백여㎉나 많은 2천8백32㎉로 과소비적인 포식의 식생활을 보여주고 있다.
소비재수입 급증과 눈덩이 같은 무역적자를 몰아오고 있는 걱정스런 과소비의 한 지류가 되고있는 「절망적 과소비」.
이 병은 여러가지 병균이 복잡하게 얽혀 발생한 신종병이다. 병인을 진단해 본다면 내집마련의 꿈의 상실,「풍선소득」,생활관의 변화 등이 중요 병균일 것 같다.
내집마련은 주택을 필요한 거주공간으로서만이 아니라 중요 재산개념으로 간직해온 오랜 국민정서 때문에 삶의 커다란 성취동기가 돼왔고 살맛을 나게 해주는 푸른 「꿈」이기도 했다.
그러나 최근들어 엄청난 집값 상승으로 이러한 꿈을 상실하게 되면서 느낀 절망감은 「에라,집장만 하긴 틀렸으니 놀러나 다니고 잘먹기나 하자」는 향락심리를 부추겼다.
내집마련의 꿈­.
70년대까지만 해도 웬만한 월급쟁이와 근로자들도 월급을 쪼개 쓰는 내핍생활을 하고,부인들이 생활비를 나누어 계를 붓고,전세를 안고,은행융자를 보태면 이 꿈의 실현에 접근할 수가 있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일반미보다 값이 싼 정부미를 사먹고 허리띠를 졸라매면서 사글세­전세­내집마련의 상향곡선을 그려가는 삶에서 뿌듯한 대견함과 사는 재미를 느꼈다. 또 이꿈을 실현시키고 난후에 느끼는 성취감은 새벽별을 보면서 일터에 나갔다가 초승달을 보며 돌아오는 고달픈 근로자들의 직장근무를 달래주는 위안이 되기도 했다.
60∼70년대에 어렵사리 내집을 마련했던 월급쟁이들과 근로자들이 겪었던 생생한 경험들이다. 그러니까 20년전만 해도 산업화과정에서 생기는 「개발이익」을 보통사람들도 나누어 가질 수 있었다. 도시계획으로 조정되는 택지가 열심히 일하고 내핍하는 근로자들의 손에도 잡힐 수 있었고,소시민들의 내집마련이 지금처럼 절망적이질 않았다.
국민 1인당 소득이 그때보다 몇배로 늘어났고 지난 1·4분기 도시근로자가구 월평균소득이 1백4만여원인 데도 오늘의 현실은 어떤가. 일생동안의 월급을 고스란히 모아도 변변한 내집 한채를 마련할 수 없는데서 오는 절망감이 자동차나 사고,외식과 해외여행이나 즐기면서 살자는 절망적 과소비의 「거품생활」을 중산층 이하 소득계층에까지 번지게하고 있다.
○집값폭등에 의욕상실
여기에 부동산 투기·뇌물 등으로 땀흘리며 일하지 않고도 돈방석에 올라앉은 「풍선 소득」이 활개를 치면서 보통사람들의 과소비바람을 자극한다. 지난 한햇동안 우리국민들이 외식과 마시는데 쓴 돈이 자그마치 정부예산의 절반에 가까운 10조6천억원에 이른다. 또 임대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이 같은 규모의 자기소유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보다 더 많이 자가용을 가지고 있다는 통계도 나와있다.
오늘의 우리국민경제 현실은 절대빈곤 인구가 총인구의 7%나 되고 인구의 절반이 내집을 갖지못한 무주택자다. 「소비는 미덕」이라고 찬미할만한 풍요로운 경제형편이 결코 아니다.
그런데도 전에는 외제차를 타려면 주위눈치를 살피기라도 했지만 이젠 아무 거리낌이 없고,과소비적인 사치에 돈을 쓸때 보였던 조심성도 이제는 「자랑」으로 바뀌어 버리고 말았다.
정부의 경제예측이 계속 빗나가고 정책대응마저 갈팡질팡하는 가운데 무역적자 급증·외환시장 혼란·외채증가·고인플레 조짐 등의 경제불안 현상이 급속히 확산되고 있는데도 그 중요원인의 하나인 과소비의 위세는 날로 기승을 부리고만 있다. 한동안 잠잠했던 물가마저도 고속도로 통행료·휘발유특소세 등의 대폭인상으로 크게 들먹일 조짐이다.
○향락과 사치뒤엔 몰락
이달 들어 지난 10일까지의 무역적자만도 무려 10억달러나 됐고 금년 상반기 총수입액 4백5억달러중 농산물·호화가구·대형 전자제품등의 소비재 수입액이 39억4천만달러로 작년 동기비 25%나 증가했다.
늘 인류역사 멸망의 뒤에는 과소비적인 향락과 사치가 그 중요원인이었다는 점을 상기할때 화투판의 고스톱처럼 자꾸만 번지고 있는 국민적 과소비를 결코 소홀히 보아 넘길 수 없다. 특히 과소비풍조의 커다란 지류를 이루고있는 「절망적 과소비」를 바로잡기 위한 정부당국의 정책개발과 전통적으로 내려온 「근검절약」의 가치를 새롭게 인식하는 범국민적 각성이 절실하다.<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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